[김수정의 우아한 한 장] 사랑의 사치(Ștefan_Luchian)
[김수정의 우아한 한 장] 사랑의 사치(Ștefan_Luchian)
  • 김수정
  • 승인 2017.02.0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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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내리는 눈으로 집안에 머물 때면 어린 시절 겪은 강원도에서의 폭설이 떠오른다. 터울이 많이 나는 삼 남매의 양육을 '전쟁' 말고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자연스레 첫째인 나는 방학 때마다 강원도 외가댁에 머물렀다. 여름이면 작은 마당에서 개구리도 잡고 꽃도 옮겨 심었지만 겨울에 눈이 펑펑 내리면 입구까지 쌓인 눈을 털어내고 하얗게 변한 바깥 풍경을 잠시 구경할 뿐, 다시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런 날 외할머니는 석유곤로에 고구마를 구워주시거나 물을 끓여 가루우유를 타 주시기도 했지만, 눈 오는 날 가장 잊을 수 없는 온기는 따뜻한 방 안에서 머리를 감겨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이었다.

누군가가 머리를 감겨주다니 얼마나 다정한가. 가장 연한 두피와 가장 섬세한 손끝이 만나는 온기. 이제 미용실에나 가야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은 미숙하다는 이유 하나로 한이 없는 사치를 누린 때였다. 여기 사랑의 사치가 가득한 스테판 루키안의 그림이 있다. 섬세함과 다정함이 가득한 그림 ‘머리 감기기(Hair Washing)’를 소개한다.

Stefan Luchian, <Hair Washing>, 1912

루마니아 최초의 현대미술가로 불리는 스테판 루키안(Ștefan Luchian, 1868~1917)은 정물화와 풍경화 그림으로 유명하며 유파로는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루키안은 아버지의 뒤를 잇기 바라는 부모의 열망을 뒤로하고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미술학교로 진학한다. 이후 루키안 역시 독일로 유학, 뮌헨 회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코레지오와 렘브란트의 부드럽고 깊은 화풍을 연구한다. 거기서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는 미술사조의 백화점 같은 분위기였다. 전통적 아카데믹 화풍의 권위와 동시에 새로이 등장한 인상주의 화풍이 함께 존재했다. 루키안은 두 화풍 모두를 놓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공부하면서 윌리엄 부게로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 동시에 인상주의 화풍을 눈여겨보았다. 화가의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기말 데카당과 함께 유행한 상징주의, 아르누보와 유겐트 슈틸의 장식형 곡선 역시 그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 루키안은 고향으로 돌아가 루마니아 상징주의 운동의 주축이 된다.

루키안의 실력은 루마니아에서도 인정받게 되고 명망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회적으로도 이름을 얻게 된다. 재력 있는 집안에서 유산으로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림은 의외로 팔리지 않았고 생의 말기로 갈수록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생애 가장 빛나던 무렵, 당시 의학으로 어떻게도 손쓸 수 없었던 다발성 경화증(뇌와 척수에 생기는 만성 염증성 질환)이 찾아온다.

‘머리 감기기’는 스테판 루키안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의 그림이다. 병이 깊어질수록 손을 사용하기가 어려워진 루키안은 관절염으로 그러했던 르누아르처럼 팔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렸다. 아이는 몸을 구부려 대야를 꼭 붙들고 있고, 여자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기고 있다. 여자의 손가락 사이에 감긴 아이의 머리카락이 짧지만 굽실거린다. 머리칼 사이로 하얗게 일어나는 비누 거품은 보글보글 부드럽게 머리를 감싼다. 아이는 구부린 채로 버티는 것이 힘든지 감은 눈을 찡그리고 있다. 아이의 귀와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이에게는 익숙한 일인지 칭얼거리지 않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끝난다. 비누 거품만 헹궈내면 곧 끝나는 일이다.

루키안은 항상 집에 머물렀다. 안락의자 하나가 루키안의 장소였다. 화가는 안락의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그림으로 바꾸었다. 화가가 그릴 수 있는 장소는 자기 집의 풍경뿐이었다. 테이블 위의 꽃병을 그리거나 곁에서 졸고 있는 가족을 그렸다. 화가의 병약한 몸은 지쳐갔지만 화가의 다정한 시선은 지치지 않는다. '머리 감기기' 역시 다정한 시선이 만든 포근한 실내 풍경이다. 지치지 않는 사랑의 시선은 사랑의 대상 위에 붓질처럼 쌓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 감기기'는 사치다. 내가 겪었던 것과 그림의 아이가 겪었던 것 모두 사치다. 심장은 주먹만 한데 흘러나오는 사랑은 끝이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언제나 과하고 대개 사치스럽다.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사랑받았던 시절이 있다. 사치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사치의 능력을 안다. 사치는 결핍을 위안한다. 비록 잠시의 위안일지라도 그렇다. 인간은 그 사치스러운 시절이 있어 마음이 가난한 시절을 견뎌낸다. 이 충만한 시절과 쓸쓸한 시절을 넘나들며 다시 사랑해야 하기에 인간으로 사는 일은 잠시 쓸쓸하고 다시 충만하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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