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다윗 기자
  • 입력 2022.05.03 19:43

가석방 직후 3년간 240조 투자 선언했지만, 8개월 되도록 구체화 못해

재수감 207일 만에 가석방 출소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3일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사진=원성훈 기자)&nbsp;<br>
지난해 재수감 207일 만에 가석방 출소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사진=원성훈 기자)

[뉴스웍스=전다윗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 마지막 사면을 단행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석가탄신일 특별 사면도 불발될 전망이다.

지난해 8월 가석방 이후 정상적 경영 참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이 부회장의 공백이 장기화되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차기 정부가 광복절 사면을 결정한다고 해도 최소 오는 8월까지 발이 묶이게 된다. 이 기간 총수의 결단이 필요한 대형 투자, 인수합병(M&A), 신사업 발굴 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리더십 부재'로 삼성전자의 글로벌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3일 재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부처님 오신 날(5월 8일)'에 퇴임 전 마지막 사면권을 행사하는 방안을 두고 고심했으나, 단행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문 대통령이 주재하는 마지막 국무회의가 이날 개최되기에 전날까지 법무부 사면심사준비위원회가 열려야 했지만, 관련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사면 대상자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이 부회장의 사면·복권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재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간 재계는 이 부회장을 필두로 취업 제한이 걸린 그룹 총수들을 특별 사면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글로벌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가중되면서 위기 극복과 경제 활성화를 위한 민간 기업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5단체는 청와대와 법무부에 이 부회장 등 기업인들의 특별 사면을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측은 따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역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새다. 최근 '삼성 위기론'이 불거지는 가운데, 리더십의 핵심인 이 부회장의 공백이 더 뼈아프게 느껴지는 탓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8월 가석방됐지만 해외 출장 때마다 법무부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글로벌 현장 경영과 네트워킹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석방 상태에서는 등기이사에 등재될 수 없기에 일선에서 굵직한 현안을 공식적으로 이끌어가기도 어렵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가석방 후 대외적 경영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총수 부재가 삼성전자의 글로벌 경쟁력을 좀먹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회장의 발이 묶인 후 대규모 투자가 위축됐다는 분석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삼성 특유의 '초격차 전략'이 삐걱거리고 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 등 시스템 반도체 분야 세계 1위로 도약하겠다고 공언하고 대규모 투자를 통한 점유율 확대에 나섰지만 지지부진하다. 파운드리 업계 1위 TSMC와의 점유율 격차는 수년째 30%포인트가 넘는다. TSMC는 올해 파운드리 사업에 최대 440억달러(약 55조원)를 투자할 방침이지만,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연간 투자 규모는 20조원 수준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TSMC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 지배력 격차가 5%포인트가량 더 확대될 것으로 관측했다. 

삼성전자가 추진하는 신사업 투자 또한 멈추어 설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앞서 이 부회장은 가석방 직후 향후 3년간 240조원을 바이오, 인공지능(AI), 로봇 등 신사업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밝혔으나 현재까지 구체적 로드맵은 나오지 않았다. 

미래 투자의 핵심인 M&A도 멈췄다. 지난 2016년 미국 자동차 전장기업 하만 인수 이후 빅딜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M&A 등 대규모 투자를 책임질 오너인 이 부회장의 공백이 이러한 상황의 배경으로 꼽힌다.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130조원에 달한다. '실탄'은 충분하지만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M&A를 통한 신산업 진출이 글로벌 경영 트렌드로 자리 잡은 점을 고려하면 아쉬운 부분이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주인과 대리인의 차이다. 오너는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지만, 대리인인 전문 경영자는 단기적 실적을 내야 하기 때문에 대규모 투자나 M&A를 결정하기 어렵다"며 "오너이면서 전문 경영인인 이 부회장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실제로 이 부회장이 사법리스크에 시달린 최근 5년간 삼성전자의 대형 M&A는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김태기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일자리연대 집행위원장)는 "이재용 부회장 사면 불발은 충격적인 결정이다. 다른 정치인 사면과 달리 국민 여론도 이 부회장 사면에 찬성했다. 정치인과 동일 잣대로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며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한창이다. 절박한 상황이지만 정부가 그것을 외면한 듯해 아쉽다. 최종 결정권자가 책임을 져야 대규모 투자도 있다"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