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다윗 기자
  • 입력 2023.04.08 08:00

[SK가 바꾼 대한민국-석유화학] 수백 배 몸집 큰 '유공' 인수…폴리에스터 필름 독자개발 신화

올해 4월 8일은 SK그룹의 창립 70주년이다. 1953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졌을 때 선경직물을 세우며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을 새긴 최종건 창업회장, 끊임없는 도전으로 SK그룹의 미래를 다진 최종현 선대회장의 발자취, 새로운 미래를 완성해가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패기와 열정은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성공 방정식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섬유로 시작해 석유화학, 정보통신기술(ICT),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까지 대한민국의 산업지형을 바꾸며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는 SK그룹의 70년을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의 결단의 순간과 우리사회에 미친 선한 영향력 등에 대해 10회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1973년 최 선대회장은 선경화섬과 선경합섬의 사장으로 취임하며 선경의 경영권을 정식 계승했다. (사진제공=SK그룹)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1973년 최 선대회장은 선경화섬과 선경합섬의 사장으로 취임하며 선경의 경영권을 정식 계승했다. (사진제공=SK그룹)

[뉴스웍스=전다윗 기자] 1973년 11월 24일 최종현 선대회장이 선경직물에 이어 선경화섬과 선경합섬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친형인 최종건 창업회장의 5일장을 마친 뒤 일주일도 안 돼 선경(현 SK)의 경영권을 정식으로 승계한 것이다.  

우애 깊은 형제이자 손발이 잘 맞는 사업 파트너였던 형을 잃은 슬픔이 가실 틈도 없이 선경을 떠맡게 된 최 선대회장 앞에는 안팎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창업회장의 타계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자신의 경영 능력을 대내외에 증명해야 했다. 이전부터 선경의 '두뇌'로서 경영 일선에 나섰지만, 평소 활동을 밖으로 드러나기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경영 능력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상당했다. 심지어 사내에서도 새 총수를 의심하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선경을 둘러싼 대외 환경도 녹록지 않았다. 제1차 석유 파동 여파로 전 세계 경제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과제에도 최 선대회장의 홀로서기는 성공적이었다. 잠재력은 있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던 선경을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특히 10년 앞을 내다본 혜안으로 그룹의 기틀을 잡고, 미래먹거리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1년 6월 선경은 울산CLX 내에 9개의 신규 공장을 준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사진제공=SK그룹)
1991년 6월 선경은 울산CLX 내에 9개의 신규 공장을 준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사진제공=SK그룹)

◆석유부터 섬유까지…'수직계열화' 천명

"선경을 국제적 기업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석유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계열화를 확립시켜야 한다. 우리의 섬유 산업을 유지·발전시키려면 석유화학공업으로의 진출은 불가피하다. 더 나아가 석유정제사업까지 성취해야 한다."

1975년 최 선대회장의 신년사는 오늘날의 SK를 있게 만든 '제2의 창업 선언'으로 평가되고 있다. 목표는 분명하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뤄 그룹 '하드웨어'를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최 선대회장이 선언한 수직계열화는 원료부터 최종 제품 생산에 이르는 전 공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당시 일개 섬유회사에 불과한 선경에게는 '불가능한 꿈'이라는 회의론이 재계에서 흘러나왔다. 내부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대다수 구성원이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수직계열화의 개념조차 확립하지 못한 임원들도 상당수였다.

첫 대졸 신입사원 공채로 선경에 입사한 손길승 SK그룹 명예회장은 "(수직계열화는)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크고 작은 고비들도 많았다. 1973년 정부로부터 정유공장 설립 허가서를 받아냈으나, 그해 1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정유공장 설립이 무산됐다. 1974년 7월에는 3개국 6개사와 합작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화학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하고 관계국 정부의 승인을 추진했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 선대회장에게는 확신이 있었고, 뚝심있게 수직계열화를 추진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등 '큰손'들과 교류하며 석유 사업 진출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후 대한석유공사(유공) 합작사인 걸프의 철수를 사전에 예상한 최 선대회장은 비밀리에 인수팀을 만들어 1980년 드디어 인수에 성공한다. 선경이 자신보다 수백 배나 큰 유공을 인수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며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1991년 6월 9개 신규 공장을 갖춘 울산콤플렉스가 완공되면서 선경은 원유 개발에서 정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봉제에 이르는 완전 수직계열화를 이루게 된다.

최 선대회장은 훗날 수직계열화에 대해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매일 생각하니까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방법도 나왔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쳐 노력하며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이 일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회고했다. 

1978년 5월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출입기자들이 선경화학이 개발한 폴리에스터 필름 신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1978년 5월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출입기자들이 선경화학이 개발한 폴리에스터 필름 신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당장 이윤보다는 기술"…10년 앞 내다본 신제품 개발

"이윤을 많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체 기술 개발이다. 이것을 게을리한다면 한국 기업은 언제까지나 낙후할 수밖에 없다. 비싼 돈으로 기술을 들여와 외국 기업의 뒤만 따라갈 수는 없다." 

1975년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을 결심하며 최 선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화의 개념조차 생소하던 1970년대, 그는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비교우위에 설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당시 폴리에스터 필름은 컴퓨터와 오디오의 자기테이프, 콘덴서, 엑스레이, 마이크로필름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글로벌 수요가 매년 20%가량 급증하고 있는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다. 기술을 보유한 곳은 미국, 일본 등 4개국의 7개사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경이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에 나서자 주변의 반대가 상당했다. 막대한 투자 비용이 들지만, 기술 개발 성공 여부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하지만 최 선대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난항에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77년 4월 선경은 마침내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그해 12월 첫 시제품을 생산하던 날, 최 선대회장은 직원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에 성공한 선경은 비디오테이프로 눈길을 돌렸다. 이 또한 폴리에스터 필름 못지않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착수한 지 5년 만인 1980년 12월 미국, 서독,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컬러 비디오테이프 개발에 성공했다. 선경의 비디오테이프는 해외 시장의 호응에 힘입어 1981년 3월 국내 시판에 들어갔고, 1984년 연간 2400만개를 생산하는 생산공장을 갖추게 됐다. 

폴리에스터 필름·비디오테이프 개발은 자원이 부족한 우리 기업은 기술 개발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최 선대회장의 철학이 여실히 묻어난 사례다.

물론 컬러 비디오테이프 개발이 성공의 종착역은 아니었다. 그 다음해인 1982년 최 선대회장은 "기업은 창조적 노력을 통해 경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서는 적은 이윤과 치열한 경쟁만 있을 뿐"이라고 독려하며 혁신 개발의 중요성을 선경의 DNA에 깊게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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