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상우 기자
  • 입력 2023.04.07 12:00

[SK가 바꾼 대한민국-섬유] '절대 가난' 1950년대 의복난 해결 넘어 섬유 수출·수직계열화 완성

올해 4월 8일은 SK그룹의 창립 70주년이다. 1953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졌을 때 선경직물을 세우며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을 새긴 최종건 창업회장, 끊임없는 도전으로 SK그룹의 미래를 다진 최종현 선대회장의 발자취, 새로운 미래를 완성해가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패기와 열정은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성공 방정식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섬유로 시작해 석유화학, 정보통신기술(ICT),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까지 대한민국의 산업지형을 바꾸며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는 SK그룹의 70년을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의 결단의 순간과 우리사회에 미친 선한 영향력 등에 대해 10회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1958년 국제청년회의소(JCI) 세계대회 참가를 위해 미국을 방문한 최종건 창업회장의 모습. (사진제공=SK그룹)
1958년 국제청년회의소(JCI) 세계대회 참가를 위해 미국을 방문한 최종건 창업회장. (사진제공=SK그룹)

[뉴스웍스=김상우 기자] "기회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버리는 것이다. 만약 결정적인 기회가 왔을 때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놓쳐버린다면 차라리 그 기회가 오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기회가 왔을 때 칼처럼 결단해야 한다." (최종건 SK그룹 창업회장)

1953년 한국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된 시기, 경기 수원시 평동에는 한국경제 '수출 역군'이 될 선경직물의 초석이 놓인다. 최종건 SK그룹 창업회장은 선경직물을 일으키면서 동란의 잿더미에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 좌절감을 안길 커다란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정면돌파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의 도전정신은 여전히 살아있어 오늘날 SK그룹의 경영환경 변화와 사업구조 한계를 극복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1953년 경기도 수원의 선경직물 공장의 모습. (사진제공=SK그룹)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1953년 경기도 수원의 선경직물 공장의 모습. (사진제공=SK그룹)

◆잿더미 속 심은 '희망씨앗'…1호 의류 수출로 이어지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48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 최학배와 모친 이동대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공립직업학교(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그는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공장에 견습기사로 들어가면서 의류산업과 연을 맺는다.

3급 기계정비사 자격을 가진 기술공인 데다가 남다른 통솔력까지 보이면서 입사 2년 만에 생산부장까지 초고속 승진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선경직물 공장이 폐허로 변하자 그의 첫 시작은 허무하게 끝이 나는 것 같았다. 남들이라면 자리를 훌훌 털고 다른 일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무슨 생각인지 불에 타버린 100여 대 직기의 부속들을 샅샅이 모아 4대의 직기를 복구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선경직물은 다시 시작했고, 4대의 직기는 불과 5년 만에 1000대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선경직물은 직물 생산에 머물지 않고 혁신 제품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양복 안감은 재단 전 물세탁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선경직물의 '닭표' 안감은 물 세탁할 필요 없이 바로 재단할 수 있어 단숨에 시장을 휘어잡게 된다. 동대문 시장에서는 도매상들이 닭표 안감을 사고자 직접 현금을 들고 공장으로 찾아와 줄을 서기까지 했고, 가짜 닭표까지 활개를 치면서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

1958년 출시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린 '봉황새 이불감'. (사진제공=SK그룹)
1958년 출시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린 '봉황새 이불감'. (사진제공=SK그룹)

닭표 안감과 함께 선경직물의 '봉황새 이불감'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출시 3개월 만에 웃돈이 붙어 거래될 정도였다. 훗날 닭표 안감과 봉황새 이불감의 출시 배경에는 동대문에서 최고로 꼽히던 도안사 조용광 씨의 영입에서 시작됐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1년 동안의 삼고초려 끝에 조 씨를 영입했다고 한다. 그 때의 인재등용은 SK그룹의 인재육성 철학으로 이어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선경직물은 닭표와 봉황새 이불감의 연이은 흥행에 힘입어 4개의 공장과 염색가공공장을 신축했고, 1962년 홍콩 무역상의 손에 건너간 닭표안감은 그해 4만6000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사업보국' 신념이 구체화된 것도 바로 이 때다.

단순한 시장 흥행이 아닌 1950년대 국내 최초의 합성직물인 나일론‧데드론 생산, 1960년대 크레폰‧앙고라‧깔깔이‧스카이론 생산 등 국내 의류산업의 혁신을 이끈 사업보국의 흔적들이다. 특히 최 창업회장은 변변한 옷 하나 구하기 힘들었던 절대 가난의 시대에서 의류 공급난 해소에 크게 기여한 점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1966년 선경이 자체 개발한 '아세테이트 원사'가 첫 출하되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1966년 선경이 자체 개발한 '아세테이트 원사'가 첫 출하되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형제 경영의 시너지…성공적 '수직계열화' 일구다

이후 선경직물은 1966년 선경화섬을, 1969년에는 선경합섬을 잇따라 설립하며 직물사업에 머무르지 않고 아세테이트 원사와 폴리에스테르 원사까지 확장하는 생산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직물 생산업체가 원사까지 발을 뻗친다는 것은 자본과 기술의 명백한 한계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비결은 최종건 창업회장의 추진력과 최종현 선대회장의 지혜가 맞물린 덕분이다.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국내 외환 대출을 성사시켜 공장 설비를 도입했다.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일본의 '제인'으로부터 연불조건으로 가져왔고, 이를 팔아 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인프라가 모두 갖춰진 시점부터 선경은 국내 1위의 섬유기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등장도 주목할 부분이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위스콘신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당시 세대에서 흔치 않았던 인재였다. 폭넓은 지식과 경제이론은 선경직물의 도약에 밑거름이 된다.

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식. 앞서 준공한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함께 폴리에스터 시장의 진출은 선경을 국내 1위 섬유업체로 올라서게 하는 발판이 된다. (사진제공=SK그룹)
1969년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식. 앞서 준공한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함께 폴리에스터 시장의 진출은 선경을 국내 1위 섬유업체로 올라서게 하는 발판이 된다. (사진제공=SK그룹)

최종현 선대회장의 경영 참여는 1962년부터다. 그해 10월 부친이 별세하자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선경직물의 부사장으로 취임한다. 당시 시도조차 생각 못 할 수직계열화를 선경직물에 적용했으며, 최종건 창업회장은 동생의 이러한 시도를 적극 지원해줬다. 훗날 형제를 회고하는 이들은 형이 통솔력과 추진력에서 월등했다면, 동생은 조직력과 계획성에서 우월해 부족한 점을 서로 보완해간 '실과 바늘'의 본보기였다고 말한다.

국내 기업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수직적 기업결합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폴리에스테르 원사 제조업체인 선경합직과 아세테이트 원사 제조사 선경화직, 직물을 생산하는 선경직물, 완제품 생산업체인 선경그룹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게 된다.

최종현 선대회장이 수직계열화를 이뤄내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수직계열화 이론의 가치는 여전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소비자 요구를 빠르게 반영할 수 있는 대체불가 경영이론이라는 평가다. 모빌리티 패권다툼이 한창인 세계 완성차 업계는 전기차 핵심부품 공급망의 수직계열화가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창업회장의 작고와 석유 파동…시련 속 도약을 찾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묘소에서 슬픔에 잠긴 최종현 선대회장. (사진제공=SK그룹)
최종건 창업회장의 묘소에서 슬픔에 잠긴 최종현 선대회장. (사진제공=SK그룹)

안타깝게도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의 의기투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종건 창업회장이 폐암 진단을 받으면서 한창 일할 나이인 48세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는 폐암을 진단한 의사에게 "나는 이미 늦었지만 나와 같은 병에 걸려 고통 받는 다른 환자를 위해 써달라"는 서신과 함께 해외에서 구한 최신 의료장비를 기증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사업보국의 의지를 불태웠다.

1973년 최종건 창업회장의 갑작스런 작고에 선경그룹을 승계한 최종현 선대회장은 세간의 매서운 눈초리와도 싸워야 했다. 그간 외부 활동은 형이 도맡아 하면서 회사 안에서까지 그의 경영능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더욱이 선경석유를 설립하려던 계획이 그해 터진 석유 파동에 좌초되면서 큰 시련에 닥치게 된다.

석유 파동은 선경의 생사를 좌우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섬유사업 원재료인 석유 공급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종건 창업회장이 생전 정유공장 설립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형의 갑작스런 부재와 살얼음판을 걷는 혹독한 대외 환경이 최종현 선대회장을 낭떠러지로 몰아넣었지만, 그는 이러한 위기에서 선경의 새로운 도약을 꿈꿨다. 성공적인 수직계열화가 위기에서 진가를 발휘할 것이라 믿고 안팎의 파고를 보란 듯이 헤쳐나갔다.

1974년 선경그룹의 원사 수출량은 전년 대비 71% 증가한 8600만달러 규모를 기록했다. 다음해인 1975년에는 200억원을 투입해 울산에 100톤 규모의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을 건설하면서 국내 전체 화학섬유 생산 능력 34%를 확보하게 된다. 어려울수록 정면돌파를 선언하는 최종현 선대회장의 승부수가 명성을 떨치는 순간이었다.

특히 최종현 선대회장은 석유 파동을 계기로 석유사업의 꿈을 한층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그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등 석유 네트워크 구축에 힘쓰는 것을 보고 단순히 수급 확보 차원으로 여겼지만, 그는 석유사업 진출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에 최적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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