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백진호 기자
  • 입력 2023.04.11 12:00

[SK가 바꾼 대한민국-IT] 세계 첫 3G·4G·5G 서비스 상용화…인공지능 등 첨단기술로 글로벌 통신사 우뚝

올해 4월 8일은 SK그룹의 창립 70주년이다. 1953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졌을 때 선경직물을 세우며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을 새긴 최종건 창업회장, 끊임없는 도전으로 SK그룹의 미래를 다진 최종현 선대회장의 발자취, 새로운 미래를 완성해가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패기와 열정은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성공 방정식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섬유로 시작해 석유화학, 정보통신기술(ICT),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까지 대한민국의 산업지형을 바꾸며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는 SK그룹의 70년을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의 결단의 순간과 우리사회에 미친 선한 영향력 등에 대해 10회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선경이 제2이동통신사업권 심사에서 최종 허가대상사업자로 선정된 1992년 8월 20일, 최종현 선대회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선경이 제2이동통신사업권 심사에서 최종 허가대상사업자로 선정된 1992년 8월 20일, 최종현 선대회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뉴스웍스=백진호 기자] "1980년대 초 유공을 인수한 뒤, 어느 회의 석상이었다. 한 직원이 '회장님! 다음 신규 사업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놀랍게도 '반도체와 이동통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미래 사업을 내다보는 혜안이 그만큼 탁월했다. 당시 반도체와 이동통신은 대단히 생소한 단어였고, 회의 이후 사전을 찾아가며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던 기억이 난다." (손관호 전 SK건설 부회장)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완성이 가시화될 즈음, 최종현 선대회장은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할지 심사숙고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가전이나 자동차가 아니었다. 이들 분야는 이미 경쟁체제가 이뤄져 있어 불필요한 경쟁이 뒤따르고, 결국 국가 산업 발전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최 선대회장이 낙점한 분야는 바로 정보통신(IT)이었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며 SK(당시 선경)는 이동통신업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동통신 진출은 최 선대회장의 숙원이었다. 그는 선경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라서려면 정보통신을 하나의 사업 분야로 가져야 함을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1980년대부터 준비했다.

앞을 보고 대비했지만, 모든 것이 쉽게 이뤄지진 않았다. 이동통신업계에 진출하기 위해 도전장을 내놓았지만 부득이하게 물러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최 선대회장과 선경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다시 도전해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며 이동통신업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후 1997년 사명을 SK텔레콤으로 바꾸고,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동시에 기술 발전에 힘써 통신의 질과 고객만족도를 높였다. 또 3세대(3G), 4G, 5G 이동통신을 잇달 세계 최초로 선보이며 새로운 통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SK텔레콤은 지난해 이동통신 가입자 수 3045만4031명으로 KT(1691만2350명)과 LG유플러스(1578만6473명)를 제치고 부동의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한국이동통신'

1980년대 들어서자 정부는 통신서비스 품질 향상을 위해 '통신사업경영체제 개선'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체신부는 1984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를 출범시켜 차량 전화와 무선호출 등 무선통신서비스를 전담하게 했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1988년 4월 한국이동통신으로 바뀌며 독립사업자로 새출발했다. 당시는 휴대용 이동전화 서비스가 등장한 시기다. 체신부는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과 경쟁할 민간 사업자인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할 계획을 세운다. 1990년 7월 12일 이동통신 분야의 경쟁체제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통신사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1992년 1월 최 선대회장은 "선경이 2000년대 세계 일류기업이 되려면 정보통신 사업에 진출할 필요가 있다. 성장잠재력이 가장 크고 기존 업계와의 경쟁이 가장 적은 정보통신 분야를 그룹의 중점 사업 분야로 추진하겠다"며 제2이동통신 사업 참여를 대외적으로 선언한다.

그의 정보통신 사업 진출 발표는 1990년대 이뤄졌지만, 선경은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통신 사업 진출을 위해 하나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선경은 미국의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1984년 텔레커뮤니케이션을 만들었고, 1989년에는 현지법인 유크로닉스를 설립해 사업 진출의 다리를 놓았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포기하고 다음 정부에서 사업을 재추진하기로 결심한다.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이 1992년 8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최종현 선대회장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포기하고 다음 정부에서 사업을 재추진하기로 결심한다.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이 1992년 8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선경은 이런 준비 끝에 1992년 포항제철, 코오롱, 동양, 쌍용, 동부그룹 등 컨소시엄과 경쟁해 1만점 만점에 8388점이라는 압도적인 평가로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선정됐다. 하지만 당시 정권과의 특혜 의혹 등 유언비어가 난무하자, 최 선대회장은 '사업권 자진 반납'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우리는 지금까지 타사가 따라올 수 없는 의지와 노력으로 추진한 이동통신사업을 결코 중단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재도전해 기필코 사업권을 다시 획득할 것이다. 이를 대비해 세계 일류 수준의 운영을 위해 필요한 경험과 능력을 배양하는 데 만전을 기해야 한다."

포기가 아니었다. 최 선대회장은 미래를 대비하며, 그때를 위해 내부 역량과 경쟁력을 만들어 줄 것을 강력 주문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 이르러서야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과 함께 한국이동통신 민영화가 동시에 추진된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전경련에 위임함에 따라 공교롭게도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최 선대회장은 또 다시 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참여를 포기한다. 대신 민영화 발표로 가격이 4배나 오른 한국이동통신을 그보다도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인수한다. 체신부의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방침에 따라 선경은 주식 공개매각에 참여했고, 한국이동통신 주식을 주당 33만5000원에 사들였다. 인수자금은 4271억원에 달했다. 

내부에서조차 지나치게 비싼 값에 샀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최 선대회장은 "회사가 아닌 미래를 샀다"고 자신했다. 그는 미래 산업변화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줬고, 선택은 얼마가지 않아 증명됐다.

선경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들. (사진제공=SK그룹)
선경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들. (사진제공=SK그룹)

1997년 3월 한국이동통신은 지금의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바꾼다. 그해 하반기에는 개인휴대통신(PCS)사 한국통신·LG·한솔그룹이 상용화를 시작하며 이동통신 시장은 본격적인 경쟁체제로 들어간다.

SK텔레콤은 1997년 10월 1일 기존 브랜드인 '디지털 011'을 '스피드 011'로 바꿨다. 스피드 011로 브랜드를 바꾼 후 SK텔레콤은 이동전화서비스는 이동전화 부문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2012년까지 15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스피드 011의 출시로 SK텔레콤은 세계 8위의 이동전화사업자가 됐다.

젊은 층이 선호했던 PCS의 출현과 신규 가입률이 떨어진 것도 잠시, 1999년 SK텔레콤은 1020세대 고객을 겨냥한 신세대 맞춤형 이동전화 브랜드 'TTL'을 공개한다. TTL의 가입자 수는 6개월 만에 100만, 30개월 만에 300만명을 넘어서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TTL의 성과로 SK텔레콤은 1999년 12월 24일 휴대전화 가입고객 수 1000만명을 돌파했다.

SK텔레콤의 '스피드 011'. (사진=SK텔레콤 홈페이지 캡처)
SK텔레콤의 '스피드 011'. (사진=SK텔레콤 홈페이지 캡처)

◆'SK텔레텍'으로 제조업 길 터…규제당국과 갈등 끝에 매각

이동통신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SK텔레콤의 다음 목표는 휴대전화 제조였다. 1998년 10월 SK텔레콤은 일본의 교세라와 공동 출자를 통해 SK텔레텍을 설립하며 자체 브랜드의 휴대전화를 시장에 선보이게 된다.

SK텔레텍은 상품 기획과 디자인 개발·국내외 시장 개척을 맡고, 교세라는 기술 개발과 휴대전화 생산·품질관리를 책임졌다.

SK텔레텍 설립 당시 국내 휴대전화 제조시장은 삼성전자, LG전자, 모토롤라 등 선도 대기업들의 무대였다. SK텔레콤이 IT 서비스와 기술 발전을 주도하려면 자체적으로 휴대전화를 제조해야 했다. 나아가 앞으로 서비스할 IMT-2000(3G 이동통신)에 맞는 휴대전화 기술을 확보하는 데도 필수적이었다.

SK텔레텍은 휴대전화 개발에 착수한 지 10개월째인 1998년 12월에 '스카이(SKY)'라는 브랜드를 달고 첫 제품(모델명 IM-700)을 출시했다. 스카이는 기존 휴대전화의 통화품질을 향상시킨 것은 물론, 더 다양한 기능과 디자인으로 소비자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1990년대 후반 검은색이 주도했던 휴대전화 시장에서 스카이는 화이트 색상의 감성을 도입했고, 휴대전화를 하나의 명품 액세서리로 격상시켰다. 또한 국내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폰과 슬라이드폰을 내놓았고, 돌출형 안테나도 양면 인몰드로 교체해 차별화를 이뤄냈다.

2001년 3월 SK텔레텍은 이스라엘과 CDMA 단말기 10만대 수출 계약을 맺으며 해외 시장에 진출했고, 2002년 1월 중국에서 최초로 휴대전화 단말기 CDMA 인증을 받는 데 성공했다. SK텔레텍은 2002년 한 해 중국 시장에서 1억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SK텔레텍의 생산 규모 제한 해제를 놓고 정보통신부와 갈등을 빚었다. 규제당국은 SK텔레텍이 한 해 동안 120만대 이상의 장치를 SK텔레콤에 공급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국 2005년 7월 SK텔레텍은 팬택에 매각됐고, 같은 해 12월 팬택과 완전히 합병됐다. 그러나 SK의 손을 떠난 스카이의 명맥은 팬택의 부도로 결국 끊기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한국이동통신이 1996년 3월 28일 세계 최초의 CDMA상용화 기념행사를 개최한 자리에는 최종현 선대회장 뿐만 아니라 이수성 국무총리,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제공=SK그룹)
한국이동통신이 1996년 3월 28일 세계 최초의 CDMA상용화 기념행사를 개최한 자리에는 최종현 선대회장 뿐만 아니라 이수성 국무총리,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제공=SK그룹)

◆세계 첫 3G 이동통신4G와 5G에서도 이어져

2002년 1월 SK텔레콤은 세계 최초로 3G 이동통신을 시작했다. 2.4Mbps 데이터 전송 속도로 동영상, 고해상도 화상 전화, 포토 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다.

이날 인천지역에서 동기식 IMT-2000 시대를 알린 SKT는 2월부터 서비스 지역을 서울로 넓혔다. 2003년 6월에는 세계 최초로 동기식 기반의 화상전화서비스를 상용화해 IMT-2000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 3G 서비스에서 선도적 위치를 확립했다.

SK텔레콤은 비동기식 IMT-2000 서비스를 위해 2001년 3월 SK IMT를 설립해 IMT-2000 서비스를 준비했다. 2002년 4월 GSM협회에 가입하며 글로벌 로밍을 위한 토대를 만들었다. 

SK텔레콤은 상용 서비스의 연기에 따른 경영 효율성 제고를 위해 2003년 2월 SK IMT를 합병했다. SK텔레콤은 시험 서비스를 거친 후 2003년 12월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비동기식 IMT-2000 상용서비스를 개시하는 데 성공했다.

2006년 5월 16일 SK텔레콤은 휴대전화 기반 고속하향패킷접속(HSDPA)을 상용화했다. HSDPA는 고속 데이터를 제공하는 3세대 이동통신 WCDMA의 속도를 더 발전시킨 기술이다. 이어 HSDPA를 통해 데이터 속도를 14.4Mbps까지 끌어올렸다.

2010년 4G가 등장하며 사람들은 데이터 다운로드를 넘어 실시간으로 영화를 보고, 콘텐츠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됐다. SK텔레콤은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였고, 2011년 7월 국내 최초로 4G LTE 서비스를 상용화했다.

데이터 속도는 75.4Mbps였고, 2013년 6월에는 150Mbps의 LTE-A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2014년 1월에는 300Mbps 속도의 3밴드 LTE-A를 선보였다. 이 역시 세계 최초의 쾌거였다. 이 사이 SK텔레콤의 LTE 가입자는 2013년 4월 기준으로 1000만명을 넘어섰다. 

이어 5G가 두각을 나타냈다. 초고속·초연결·초저지연 기반의 기술로 급부상했다. SK텔레콤은 이번에도 기록을 세웠다. 2019년 4월 3일 세계 최초로 5G를 상용화했다.

SK텔레콤의 5G 서비스 상용화 이후 초기 가입자는 증가 추세를 보였다. 2019년 4분기에는 208만이었고, 2020년 1분기에는 265만을 기록했다. 2020년 2분기는 335만명에 달했고, 2020년 3분기와 4분기는 각각 426만과 548만에 이르렀다.

최근 SK텔레콤의 행보는 텔레콤사업에만 머물지 않고 있다. 최근 주목받는 메타버스,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SK텔레콤은 지난 2021년 7월 14일 '이프랜드'라는 메타버스 플랫폼을 출시했다. 출시 1년 만에 누적 다운로드 870만건 제휴요청 2000건을 달성해 주목받고 있다.

인공지능(AI)분야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SK텔레콤은 지난해 5월 사용자 맞춤형으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공지능(AI)서비스 '에이닷'을 선보였다. 에이닷은 개인화 AI 비서라는 수식어에 맞춰 최근 장기기억 기술, 이미지 기반 소통 기술, 영어 학습 기능 등이 업그레이드되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윤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체적인 기술 개발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한국 기업은 언제까지 낙후할 수밖에 없다. 비싼 돈으로 기술을 들여와 외국 기업의 뒤만 따라갈 수는 없다.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선경의 저력을 믿는다."

1975년 최종현 선대회장이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을 결심하며 한 말이다. 이같은 생각이 50년 뒤 SK텔레콤의 오늘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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