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0.13 09:42

화가에게 모델은 자주 사랑의 대상이 된다. 사랑의 대상이어서 모델이 되기도 하고, 모델이 되어서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수많은 화가들이 연인과 가족을 모델로 하여 사랑이 담긴 작품들을 남겼다. 여기 놀라운 사랑의 시선이 담긴 연작이 있다. 존 에버릿 밀레이가 자신의 딸을 모델로 하여 그린 두 장의 그림은, 사랑이 있다면 어떤 지루한 일상도 웃음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품 같다.

존 에버릿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결혼에 이른 과정은 막장 드라마 같다. 밀레이가 속했던 라파엘 전파의 정신적 지주였고 스승 같은 친구였던 존 러스킨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밀레이는 러스킨 부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후 결혼 무효 소송을 통해 이혼한 에피 그레이와 결혼한다. 연달은 이혼과 재혼의 스캔들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크림 전쟁의 소식을 잠시 뒤덮을 만큼의 화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의 끝은 나쁘지 않아서, 밀레이 부부는 여덟이나 되는 아들딸을 낳고 내내 행복한 삶을 누렸다. 이제 밀레이는 기존 양식을 거부하던 라파엘 전파의 이념을 고집하지 않았다.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대중의 취향에 맞는 그림 주문을 기꺼이 받았고,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닝 아닌 트레이닝은 밀레이의 또 다른 재능을 일깨우게 된다. 밀레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그림을 그려낸다. 사람의 마음이 모이면 권력이 된다. 곧 밀레이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부를 거머쥐었으며 사회적인 인정도 받게 된다.

John Everett Millais <My First Sermon> 1863

특히 이 그림, <나의 첫 설교>와 <나의 두 번째 설교> 연작은 밀레이의 그림 중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듣고 있는 또랑또랑 긴장된 소녀의 모습과, 설교를 듣다가 잠에 빠져 버린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되어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에피 밀레이는 아내 에피 그레이의 이름을 붙여 지은 아내 미니미 같은 딸이었다.

흰 깃털이 꼿꼿하게 선 모자를 목까지 리본으로 당겨 묶은 채 빨간 망토를 입고 있는 소녀, 등을 꼿꼿이 편 채로 모피 토시 안에 손을 넣어 쥔 소녀. 소녀의 왼편에 놓인 성경책조차도 비뚤어짐 없이 평행으로 놓여 있다. 엇갈려 모은 발목은 소녀가 발끝까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긴장이 풀린 곳이라면 토시 사이로 삐져나온 손수건 정도랄까. 소녀는 처음 듣게 되는 설교에 한 마디를 놓칠세라 초롱초롱한 눈빛을 밝히고 있다.

John Everett Millais <My Second Sermon> 1864

그러나 다음 그림에서 소녀는 평화롭게 졸고 있다. 열심히 들었던 첫 설교가 아무래도 흥미롭지 못 했던 것 같다. 기대기에 배겼는지 갑갑하게 묶었던 깃털 모자는 어느새 의자로 치워져 있고, 곱슬머리는 기울어진 고개와 함께 늘어져 있다. 꼿꼿했던 등은 벽에 기대었고 엇갈려 모았던 다리는 허공에 대롱대롱 떠 있다. 이 대조적인 두 그림을 함께 보았을 때 얼마나 웃음이 나는지, 먼저 그림은 긴장감이 넘쳐 사랑스럽고 다음 그림은 긴장감이 풀려 사랑스럽다.

정확한 사랑의 시선이 능력이다. 사랑의 눈길만 있으면 긴장감이 넘치는 순간도 긴장감이 풀린 순간도 사랑스럽게 포착할 수 있다. <나의 첫 설교>와 <나의 두 번째 설교>가 수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던 것은 그러한 눈길이 만들어낸 걸작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의 눈길만 정확히 있으면 된다. 사랑의 눈길만이 지루한 일상을 기쁨으로 만들어준다. 당신에게는 사랑의 시선이 있는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밀레이 수준이다. 사랑의 눈길만 있다면 그 누구라도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바로 그 시선으로 당신의 일상이 놀라운 그림이 될 수 있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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