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1.02 09:50

미술인의 덕목은 역시 힘이고 노동이다. 물감이며 도구며 화구박스며 바리바리 싸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라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인지라 팔은 두 개이고 다리도 두 개일 뿐이니까 말이다.

어떤 일이든 하다보면 물건을 많이 옮겨야 할 때가 있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하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것에 거리낄 것은 없지만 솔직히 버겁다. 말은 안 하지만 혼자 꾸역꾸역 택배 박스나 재료 뭉치들을 산처럼 쌓아 옮기곤 한다. ‘다들 바쁜데 나까지 도와줄 틈이 어디 있겠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일을 기대하지 않기에 어렵다면 어려운 그대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러나 오늘은 상상도 못했던 도움이 있었다. 여느 날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쌓인 물건을 옮기는데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누군가가 쌓여있던 종이박스 두 개를 가뿐히 들어 주었다. 우연히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던 동료가 혼자 큰 짐을 옮기는 나를 도와준 것이다. 덕분에 박스들을 쉽게 엘리베이터로 옮겼고, 물건을 1층에서 4층까지 금세 옮기게 되었다. 예상치 못 했던 손길에 놀라운 도움의 능력을 느꼈다. 누군가의 손길이 왔다갔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힘이 되고 일이 빨라질 줄은 몰랐다. 돕는 손길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이 되는 것이구나.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실감하게 되었다.

돕는 자가 단 하나라도 곁에 있다면 혼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 혼자서는 오르기 힘든 산을 오를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때문에 힘을 받고 균형을 맞춰 오르막을 오를 수 있고, 아슬아슬한 빙판길을 걸을 때 견고한 곳에 서 있는 누군가에 기대어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다.

돕는 손길은 단단하고 견고하고 따뜻하다. 그러한 '돕는 손길'이 잘 드러난 그림, 이탈리아 혈통을 가진 인상주의 화가 프란체스코 파넬리(Francesco Fanelli, 1869~1924)의 그림 「Primi fiori」을 소개하고 싶다.

Francesco Fanelli <Primi fiori> (1899)

연하고 파릇파릇한 초록이 가득한 강가, 초록빛 냄새와 물기 가득한 공기가 그림에 가득 스며 있다. 자매로 보이는 두 소녀가 강가에서 손을 잡고 있다. 언니로 보이는 여성이 강가의 꽃을 꺾으려 허리를 숙이고 있다. 꼭 그 위험한 곳에 있는 꽃을 꺾어야 할까 싶지만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이니 당연한 행동이다. 강가는 진흙으로 미끌미끌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다. 팔을 길게 내어밀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놓치면 미끄러질 것이 분명하다. 언니가 손을 길게 뻗으면 뻗을수록 무게중심은 벗어나고 진흙이 가득한 자리는 아슬아슬하다. 동생은 언니의 손을 꼭 잡고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있다. 혼자라면 결코 저 꽃에 손을 내어밀 수 없다. 누군가의 강인한 도움의 손길 때문에 원하는 일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돕는 손길을 기대하지 않은 기간이 얼마나 오래였는지 모른다. 돕는 손길은 예상치 못하게 다가와 놀라운 힘으로 힘겨운 이를 세워준다. 돕는 손길을 찾기 힘들고, 돕는 손길이 아무리 찾아도 오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돕는 손길은 분명 존재한다.

인생에 돕는 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훈훈한가. 돕는 자가 곁에 있다면 혼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 인생에 돕는 자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뼈아픈가. 돕는 자가 곁에 없어서 상상도 해 보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 도전이 얼마나 많은가. 가끔, 아주 가끔 찾아오는 돕는 손길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을 뜨겁게 느끼게 된다. 삶은 그렇게 가끔의 온기로 오래 계속된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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