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우성숙 기자
  • 입력 2022.06.23 11:57
조순 전 경제부총리. (사진=안철수 SNS 캡처)
조순 전 경제부총리. (사진=안철수 SNS 캡처)

[뉴스웍스=우성숙 기자] 한국 경제학계의 거목(巨木)이자 관료, 정치인으로 대한민국의 역사와 굴곡을 함께 한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가 2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와 6·25 당시 육군 통역 장교와 육군사관학교 교관 등으로 군 복무를 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클리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68년 귀국해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그러다 육사 교관 시절 인연이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1988년 경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경제 관료로 변신한 뒤 1992년에는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이후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한 고인은 1997년 민주당 총재와 대선주자, 한나라당 총재 등을 거치며 명성을 떨쳤다.

교수와 관료, 정치인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 오며 그가 남긴 발자취는 화려하다.

먼저 교수로서 남긴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순학파'로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며 한국 경제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것. 특히 1974년 그가 펴낸 '경제학원론'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이자 경제학의 대표적인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또 우리 경제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함께 해법을 제시하는 보고서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한국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런 그가 '현실 참여형 학자'로 변신한 것은 1988년이다. 육사 교관 시절 영어 제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권유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으면서 경제 관료의 길에 들어서 직접 우리나라의 경제를 진두지휘한 것이다. 이후 1992년부터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사표를 냈다. 당시 고인이 보여준 모습과 확고한 신념은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대쪽 학자'로서의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게 된다.

사회는 그런 그를 학자, 경제 관료로만 두지 않았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후보로 서울시장으로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한 고인은 1997년 민주당의 총재와 대선주자, 한나라당 총재와 명예총재 등을 거치며 정계에서도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비록 대선 주자로서는 완주하지 못했지만 1998년 강원 강릉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대표로 총선을 지휘했지만 선거 참패 후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퇴장했다. 이후 서울대와 명지대 명예교수,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등을 지내며 한국의 경제와 정치 원로로서 역할을 해왔다.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그를 잃었다는 자체가 국가적으로는 큰 손실이다. 길고 빽빽한 흰 눈썹과 번뜩이는 눈빛, 그 동안의 대쪽 행보가 강조되면서 '서울 포청천', '백미(白眉·여러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 '산신령' 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고인이 남긴 족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벌써부터 그의 혜안과 확고한 신념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뭘까. 비록 그는 떠났지만 고인이 남긴 시장경제 원칙과 분열보다는 화합을 도모하고자 했던 그의 가르침은 이 땅에 영원히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작금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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