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상우 기자
  • 입력 2023.07.12 16:16

[뉴스웍스가 만난 사람] 김승래 대한장기협회장 "전통문화 유산 아닌 유물될 수도…정부의 관심 절실"

김승래 대한장기협회장이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상우 기자)
김승래 대한장기협회장이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상우 기자)

[뉴스웍스=김상우 기자] 지난달 일본에서는 ‘쇼기(일본 장기)’ 열풍이 한바탕 휘몰아쳤다. 20살 약관의 후지이 소타(藤井聡太)가 ‘메이진(名人)’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최연소 7관왕에 오른 것이다.

마이니치신문이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 쇼기의 국민적 관심을 대변했다. 대단하다면 대단한 업적이겠지만, 우리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어색함이 느껴질 정도다.

김승래 (사)대한장기협회 회장은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며 아쉬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한국 장기가 쇼기에 못지않은 엄청난 매력이 있지만, 대중이 그 매력을 잘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다. 그는 한국 장기가 승부에만 머무는 단순한 차원의 게임이 아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처세 철학 등이 어우러져 있다고 강조한다. 깊이 들어가면 ‘한 줌의 고요’를 낚는 무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다.

◆숙명 같은 장기의 세계…은행원과 프로기사를 겸업하다

김승래 회장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단아’란 말이 절로 나온다. 1982년 하나은행 강릉지점에서 근무하던 27살 때에 프로에 입단했다. 은행원과 장기 프로기사라는 ‘이중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장기의 세계에 빠진 것도 마치 준비된 외통수처럼, 거역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집에서 장기 묘수풀이 책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장기 묘수풀이 책이 흔하지 않았던 때죠. 그 묘수풀이를 풀면서 엄청난 희열을 느꼈습니다. 장기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죠. 기물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간직한 군사였고 이를 어떻게 운영해 승리할 것인지,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의 마음이 이입되더군요. 알면 알수록 심오한 장기의 세계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한 번 빠진 장기는 프로기사의 꿈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큰형은 장기판과 기물을 아궁이에 불살라버릴 정도로 반대가 심했다. 집안에서 공부를 가장 잘한 동생이 장기에 빠지는 꼴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단호함이었다.

이에 김 회장은 ‘작전상 후퇴’를 외치며 은행에 입사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간섭이 덜해질 것이라는 묘안이었다. 이후 은행원 3년 차에 숨겨뒀던 꿈을 실행에 옮겼고, 프로 입단 관문을 단번에 뚫었다.

더욱이 프로에 들어왔다고 본업을 절대 소홀하지 않았다. 행여나 있을 주변의 편견을 깨고자 직장생활에 더욱 매진했다. 장기를 정말 좋아해 프로 입단까지 했지만, 프로기사 활동은 주말에만 짬짬이 시간을 내며 공사를 확실히 구분했다. 1998년 외환위기 광풍에 금융가가 대대적 구조조정에 나설 때도 김 회장은 그동안의 성과를 인정받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흥미롭게도 김 회장은 프로 입단 이후 승부사로 나서기보다 장기계가 처한 어려운 실정에 주목했다. 그의 유창한 언변과 호탕한 성격에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모두가 김 회장에게 한국 장기의 산파 역할을 해줄 적임자라며 손을 내민 것이다.

“입단 이후 대다수 프로기사가 턱없이 부족한 대회에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저야 본업이 따로 있어 궁핍하지 않았지만, 선배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죠. 국내 장기 인구가 1000만명으로 추산됐지만, 이러한 잠재력을 방치한 탓입니다. 장기의 매력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김승래 대한장기협회장이 이성민 KBS 아나운서와 함께 KBS장기왕전 해설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장기협회)
김승래 대한장기협회장이 이성민 KBS 아나운서와 함께 KBS장기왕전 해설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장기협회)

◆한국 장기의 중대한 전환점…“K-콘텐츠 첨병 자신 있다”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장기의 재미를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김 회장은 협회 강릉지부장을 시작으로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대한장기협회 6~7대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프로기사들의 승패 등을 기록하는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구축했고, 장기대국규정과 장기전용 초시계 등을 도입했다. 기본적인 틀을 갖추는 일이 변화의 시발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2002년부터 시작한 KBS장기왕전 해설은 그를 ‘장기계 아이돌’로 만들어줬다. 김 회장의 구수한 입담에 매료된 시청자들이 하나둘 늘어나며 장기계 저변이 조금씩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KBS장기왕전은 여러 이유로 인해 2016년을 끝으로 폐지되고 말았다. KBS장기왕전 해설을 진행하면서 큰 성취를 이뤄낸 김 회장은 장기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본격적으로 뒷받침된다면 큰 인기를 끄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중국 장기인 상기와 일본의 쇼기는 세계대회도 진행될 만큼 입지가 단단합니다. 중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전통문화 유산이라는 공통된 인식 아래 정부의 지원이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정부의 지원사격은 국민적 관심이라는 놀라운 성과로 나타났고요. 우리도 정부의 관심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우리 고유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 유산을 보존하겠다는 명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K-콘텐츠’의 첨병 역할을 할 것입니다.”

김 회장은 전 세계를 휩쓰는 한류 열풍에 한국 장기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강조했다. 한국 장기를 K-콘텐츠의 영향력에 집어넣는 동시에 어린이들 보급에 성공한다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부흥을 맛볼 수 있다는 청사진이다. 반면 이러한 계획이 무산된다면 한국 장기가 하나의 유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도 내비쳤다.

그는 장기를 초등학교 방과후교실에 도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브레인 스포츠인 만큼 유소년 두뇌 발달에 유익하고 정신 수양의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또한 군 장병과 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보급에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직접 개설해 맛깔나는 입담을 전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 사이트의 장기 활성화와 인공지능과의 연계성도 고심하고 있다.

앞서 김 회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에 남북 장기대회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남북관계 악화로 대회 추진이 무산됐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질 과제로 보고 있다. 북한은 장기를 즐기는 이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려진 만큼, 남북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지론이다.

김승래 대한장기협회장이 유튜브를 통해 대국 해설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대한장기협회)
김승래 대한장기협회장이 유튜브를 통해 대국 해설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대한장기협회)

◆“차 하나로는 못 이기지만, 졸 2개로는 이겨”

김 회장은 지난 5월 대한장기협회 8대 회장으로 당선돼 세 번째 회장직을 맡게 됐다. 올해 66세로 적잖은 나이지만, 열정만큼은 20대 프로 입단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 동안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 우리 장기의 매력을 설명했다.

그는 한국 장기가 중국 상기와 일본 쇼기에 없는 '빅장(무승부)'과 '한수 쉼'이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빅장은 극한 정쟁 속에 협상의 묘미가 있고, 한수 쉼은 응전 만이 다가 아닌 선조들의 낭만적인 위트를 엿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상기와 쇼기가 행마에 여러 제한을 걸어두고 있지만, 한국 장기는 이러한 제한이 없어 창조적 전략을 실행할 수 있다. 한국 장기의 대국 수순이 상기와 쇼기보다 훨씬 길다는 사실도 이러한 독창성을 입증한다. 여기에 상대 기물을 잡아 자신의 기물로 쓰는 상기와 쇼기와 달리, 자신의 병력으로만 일전을 치른다는 점도 한국 장기의 독창성과 품격을 보여준다고 부연했다.

“한국 장기는 '차(車)' 하나로는 못 이기지만 '졸(卒)' 두 개로는 이깁니다. 졸은 한 칸 전진만 가능하다는 제약이 있어 기물 중 가치가 낮다는 인식이지만, 졸이야말로 ‘순수(純粹)’함을 극명하게 대변하는 존재입니다. 시쳇말로 ‘나를 졸로 보느냐’는 말도 있잖아요.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를 졸로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졸의 그 순수하고 묵묵히 한 칸만 전진하는 행마는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졸의 순수한 전진으로 인생을 산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바둑계나 장기계에선 프로 9단을 '입신(入神)'이라고 칭한다. 이같은 김승래 회장의 장기에 대한 깊은 해석은 그가 왜 프로 9단인지를 방증해준다.

마지막으로 김 회장은 “한국 장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한 줌의 고요를 낚는 것”이라며 “노자 도덕경에 ‘철저히 비우고 참된 고요함을 지키라’는 말처럼, 한판의 장기는 순수함과 고요함이 녹아들면서 서로에 대한 포용력을 간직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장기의 이러한 매력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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