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원성훈 기자
  • 입력 2024.01.18 08:00

[뉴스웍스가 만난 사람] "광주시민들, 5·18 당시 '친북·반미' 외치지 않아…왜곡·악용된 것"

김형석 박사. (사진제공=김형석 박사)
김형석 박사. (사진제공=김형석 박사)

[뉴스웍스=원성훈 기자] 자타가 공인하는 '사학계의 거두'로 대한민국 역사와미래 재단 이사장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김형석 박사를 최근 서울 여의도 소재 '역사와미래'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박사는 현대사에 정통한 학자로 고신대학교 석좌교수이며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 및 '통일과나눔'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특별히 고하 송진우 선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좌우 양 진영 모두에 인정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도 사회 각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송진우 선생과 미군정, 그리고 상하이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를 비롯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김 박사의 분석을 듣는 것은 유익하다고 판단된다. 이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아래는 김형석 박사와의 일문일답이다. 

-고하 송진우 선생은 민족주의자라는 시각도 있지만, 일각에선 친일 지주라는 평가도 있다.

"고하는 해방 후 '우파 민족주의'의 출발점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자로 박헌영의 남로당계를 제외한 모든 정파를 아우른 사람이다. 한마디로 '국민통합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이다. 

첫째, 고하는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자보고서에 포함된 적이 없다. 고하와 인촌 김성수 선생과의 관계를 비롯해 고하가 한민당 대표(수석 총무)였다는 것으로 인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민당에도 고하나 가인 김병로처럼 친일 행적이 전혀 없는 민족지사들도 적지 않았다. 학계에서 고하를 '민족적 민주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둘째, 고하가 지주 계층인 것은 맞다. 그러나 천석꾼, 만석꾼으로 불리는 대지주가 아니었다. 조부 때는 담양에서 300석을 거두는 중소지주였지만,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후에는 몰락한 지주였다. 고하가 중요한 것은 '조선지광' 1929년 1월호에 발표한 '소작입법의 필요'라는 글에서 유상 몰수, 유상 분배의 '토지 개혁'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요즘에는 일반화된 입장이지만 그때로서는 파격적인 기간산업의 국유화, 사형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고하를 '중용적 진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김형석 박사의 사무실 책장에는 역사를 비롯한 인문과학 서적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사진제공=김형석 박사)
김형석 박사의 사무실 책장에는 역사를 비롯한 인문과학 서적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사진제공=김형석 박사)

-미군정이 친일파 청산에 걸림돌이 됐고,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한 견해는.

"미군정이 친일파 청산에 대해 미온적이었던 것은 당시 남한지역의 안정을 목표로 한 현실적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첫째, 미군정은 소련과 협력해 좌우연합을 내세워 신탁통치에 참여시키고 한반도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이런 점에서 미군정이 친일파 청산에 걸림돌이 됐다고 인식하고, 미군정이 친일파 청산의 걸림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견강부회적인 태도다.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친일파 청산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해결해야 문제였기 때문이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아서 친일파가 반공주의자 및 재벌로 성장한 것으로 보는 것은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단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정부 수립 이후 국가 건설이라는 차원에서 반민특위법이 좌절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일부 친일파 인사들이 정경분야에서 득세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반공주의와 대기업의 성장은 6·25전쟁이 계기가 됐고, 이후 1950년대 국가 재건, 60~7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자본주의사회의 틀 안에서 다양한 리더십과 국제정세, 국민들의 열정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해방 직후의 국가 건설, 6·25 이후의 국가 안보, 60~70년대 경제개발은 그때마다 주어진 국가의 과제이자 시대정신이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민족정기만 주장하는 것은 이념에 경도된 자의적 해석이다."

-상하이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공식 임시정부가 되면서 항일 무장투쟁이 사실상 종식됐다는 시각에 대한 평가는.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민족운동을 이끌고 갈 총본산으로 국내외 여러 임시정부가 설립됐고, 곧이어 통합운동이 전개됐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에 국내에 수립된 한성정부의 법통을 인정하고 정부의 위치를 상하이에 두는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 통합 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당대 민족운동의 흐름이었던 무장 투쟁론, 외교 독립론, 실력 양성론 등의 다양한 노선이 결합해 성립됐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임시정부가 처한 역사적 환경을 고려하면 이런 노선들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통합임시정부가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들과 연계하며 독립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상하이 통합임시정부의 출발로 항일 무장투쟁이 사실상 종식되고 실질적인 독립운동이 형식적이고 무력한 독립운동으로 넘어갔다는 시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거나 치열했던 그 역사를 부정하는 관점이므로 이해할 수 없다."

-최근 5·18 관련 토론회에 참석했다. 5·18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지난해 12월 13일 서울 종로구 태화빌딩에서 5·18민주화운동연구소 창립을 위한 토론회가 있었다. 이 연구소는 민경우 민주화동지회 회장이 소장을 맡고, 황일봉 5·18부상자회 회장이 이사장을 맡았는데, 나에게 주제 강연을 부탁해왔다.  

그래서 ‘5.18은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5·18은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광주 시내 9개 대학 3만여 명이 참여한 민주화대성회가 발단이 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런데 5월 18일 전국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계엄군이 투입돼 진압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했으며,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하고 계엄군을 상대로 시가전을 치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처음으로 열흘 동안이나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방구가 됐다. 그러나 당시 시민들은 '친북'이나 '반미'를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항공모함이 들어와서 격리된 광주시민들을 구해줄 것이라는 가짜 뉴스에 시민들이 환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5·18정신이 '친북'과 '반미'인 것처럼 왜곡되면서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