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2.08 16:27

(3) 동부전선에서-2

> 네덜란드 혈통을 지닌 미 장성이 신임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 이름은 제임스 밴 플리트. 1951년 4월이었다. 한국의 전선을 지탱하던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미 정부로부터 해임 조치를 받았다. 그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매슈 리지웨이 대장이 올랐다. 공백이었던 신임 미 8군 사령관으로 밴 플리트 장군이 도착했던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에게는 매우 특별한 사령관이었다. ‘혼신의 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모든 역량을 집중해 한국의 전선을 막고, 아울러 그 토대인 한국 군대의 증강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중공군 공세는 막바지를 향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한국에 부임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한국의 고아원을 방문해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한국의 아이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모습이다.

 

> 1951년 4월 27일 촬영한 사진이다. 임진강 인근에서 중공군의 추가 공세를 막던 무렵의 미군 부대 모습이다. 중공군은 서부 전선을 계속 두드렸다. 1951년 3월 15일 점령했던 서울을 다시 아군에게 내준 뒤였다. 서부전선에서의 중공군 공세는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미군이 그 앞을 막았고, 영국과 호주 및 터키의 아군 역량이 역시 중공군 공세를 꺾었다. 그럼으로써 중공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을 엿보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한국 군대의 방어지역을 공략하는 게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수적인 열세에 놓이기는 했지만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각 부대는 중공군 공세에 강렬한 저항을 하며 서부전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 가평에 있던 영국군 부대를 미군 장성이 시찰하고 있다.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중공군 거대 병력을 상대로 가평과 경기 북부에서 강력한 저항을 펼쳤다. 그로써 서울을 내준 뒤 다시 공세에 들어섰던 중공군 발길은 큰 장애에 직면했다. 문제는 동부전선이었다. 중공군은 공세에 진전이 없던 서부전선 대신 동부전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동부전선 일대에는 긴장감이 쌓여갔다. 중공군은 조심스럽게, 밤을 낮 삼아 이동했다. 대병력이 원주를 넘어 더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가 속속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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