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1.19 16:00

사오싱은 ‘師爺(사야)’라고 적는 일군의 재주꾼들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중국 근대에 해당하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들어서면서 저장의 사오싱은 곧 ‘사야’들의 고향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 ‘사야’라고 했던 인재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현대 중국 문단의 최고봉 루쉰이 저장 사오싱 출신이다. 이곳은 역대의 유명한 책사들을 낳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사회주의 중국을 이끌었던 저우언라이의 원적지도 이곳이다. 사오싱 루쉰의 생가 전경이다.

중국의 가장 오래 된 관제(官制)는 주(周)나라 때 등장했다. 춘추시대 이전에 해당하니 지금으로부터 2500년이 더 흘렀다. <주례(周禮)>와 <예기(禮記)>, <의례(儀禮)> 등의 주나라 예법에 등장하는 관제 중의 하나에 ‘막인(幕人)’이라는 존재가 있다. 이들은 대개 장막(帳幕)과 책상, 나아가 행정에 필요한 일반 서류 작업을 담당하는 직무의 관리들이었다. 

특히 임금으로부터 군권(軍權)을 부여받아 전쟁 관련 사무를 위해 지방으로 또는 전쟁터로 나가는 무장(武將)들에게는 출정(出征)이 일상의 업무 중 가장 큰일에 해당했다. 병력을 움직이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들을 지휘하기 위해 사령부를 설치하고 지휘소를 옮기는 일이 번거로울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지휘하는 무장이 지휘소를 옮길 때 그 장막을 관장하며, 장수가 사용하는 책상, 나아가 행정적인 필요에 따라 발생하는 문서 작업을 관리하는 사람이 바로 막인(幕人)이었다. 원래의 의미는 그에서 비롯했지만 결국 그 막인은 전쟁을 지휘하는 지역 사령관의 핵심 참모라는 뜻을 얻는다. 

이 막인으로부터 나온 단어가 막료(幕僚), 그리고 막부(幕府)다. 막료라는 존재는 행정 관료나 지역 수장, 또는 전쟁 관련 사무를 모두 관할하는 지역 사령관의 핵심 참모라는 뜻이고, 막부는 그들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나중에는 모두 권력을 지닌 사람의 참모와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뜻을 얻는다. 

관제의 명칭에 등장하는 막인이라는 직급은 그 업무가 단순했다. 지방 행정관료 또는 지역 사령관을 수행하면서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장막을 옮기고 책상을 나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이 말이 어떤 관료나 지역 수장, 나아가 병권을 쥔 장수의 핵심 참모라는 뜻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는 그 뒤다. 

동진(東晋 316~420년) 때에 생긴 일화다. 동진은 삼국시대에 이어 중원의 권력을 차지한 서진(西晋 266~316년)이 북방의 유목 민족 정권에 밀려 장강(長江) 이남으로 내려온 뒤 세워진 왕조였다. 그 동진에 환온(桓溫)이라는 권력가가 있었다. 그 역시 동진의 왕조 세력과 함께 중원지역에서 장강 이남으로 밀려 내려온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 사안(謝安)이었다. 역시 동진의 관가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인물로, 환온이 라이벌로 생각할 정도로 정치적 위상이 매우 높은 관료였다. 하루는 사안이 환온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환온은 정치적 라이벌에 해당하는 사안에게 감출 일이 적지 않았다. 특히 그가 곁에 두고 있는 인물을 함부로 노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설에는 환온이 당시 동진의 정권을 노리는 정략에 몰두했다고 한다. 따라서 극비리에 일을 진행하다 보니 사안 등에 그런 조짐을 보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는 것이다. 환온은 어쨌거나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들을 모아 궁정 쿠데타를 논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연유로 극초라는 이름의 사람이 마침 환온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둘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모의하고 있었던 듯하다. 사안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극초는 환온의 지시에 따라 얼른 몸을 감췄다. 내실(內室)의 장막 뒤편이었다. 환온의 집을 찾은 사안은 그 장막 밖의 거실에서 환온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었다. 장막이 걷히면서 극초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안은 그가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이유를 얼른 짐작했다. 마음속으로는 ‘결국 너희들이 함께 노는구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안은 그저 웃으면서 “극초 선생이 장막 안의 손님(入幕之賓)이 되셨구랴”고만 말했다. 

중국 역사에서 누군가의 핵심 참모라는 의미의 ‘막료’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였다. 사안과 환온, 극초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 일화에서 결국 오늘까지 무엇인가 같은 뜻을 세우고 행동과 사고를 함께 하는 참모라는 의미의 ‘막료’와 ‘막부’라는 단어가 생겨났다는 얘기다. 

사족(蛇足)에 해당할지는 모르지만, 이 ‘장막 안의 손님’은 결국 동성애를 뜻하는 용어로도 발전했다. 은밀한 장막 안에 들이는 사람은 결국 침실(寢室)을 함께 쓰는 사이라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무래도 내밀한 일을 함께 모의(謀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동진의 수도는 지금으로 따지면 난징(南京)이다. 그러나 사안의 고향이 바로 저장의 사오싱이다. 지금의 난징에 수도를 둔 동진 왕조의 상층은 대개가 중원에서 이미 몰락한 서진(西晋) 왕실을 따라 함께 남하한 문벌 귀족 가문의 구성원들이었다. 전란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권력자를 중심으로 뭉쳤고, 어느 정도의 기반을 다진 권력자들은 그런 문벌 귀족 가문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스카우트’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풍조가 있었다. 

사안과 환온의 일화는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아울러 그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은 우선 힘을 모은 권력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중이었다. 막료와 막부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중요성은 점점 더해진다.  

대개 동진 시기를 중심으로 이런 막료와 막부가 초기의 모습을 드러낸 뒤 중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참모를 지향하는 그룹의 인재들은 늘 생겨났고, 뚜렷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다툼이 벌어져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며 극도의 분란을 자주 맞이하곤 했던 중국에서는 이런 ‘같은 편먹기’ 식의 결집(結集)과 분산(分散)은 늘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唐) 나라 이후 지방 행정관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중앙의 관료임용 제도를 거치지 않은 참모들의 발탁과 등용은 더욱 성행했다. 당 나라 이후의 어지러웠던 시절인 오대(五代) 시기에는 그 도가 훨씬 더 했다고 한다. 북송(北宋)에 들어서면서 지방 막료에 관한 임용을 중앙이 통제하면서 이런 풍조는 잠시 멈칫한다. 

그러나 명(明)대에 들어서면서 이는 훨씬 더 정형화한다. 특히 저장성, 그 중에서도 사오싱의 인물들은 각 지방 관리, 나아가 병권까지 지니고 큰 힘을 행세하는 지역의 수장 밑에서 돈을 주무르고, 장부를 관리하며, 권력자의 ‘문장 써주기’ 대리인 등으로 맹활약을 한다. 아울러 자신의 상관이 좀 더 높은 권력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책략과 모략의 제공자 역할도 한다. 

그래서 그 즈음에 뜨는 게 저장의 서리방(胥吏幇)이다. 서리는 행정의 주요 계통에 서있지는 않으나 실무 행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현지의 인재 그룹이다. 특히 중앙행정과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펼쳐지는 지방행정에 있어서는 이들 ‘서리’, 또는 우리 식 표현인 ‘아전(衙前)’들은 필수적이었다. 그 서리 그룹 중에서도 저장 출신 서리들의 이름이 높았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했던 그룹이 사오싱 출신이었다. 

‘사야’라는 단어는 명나라, 혹은 그 이후인 청나라 때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말이다. 강력한 권력을 쥔 지방 행정관 밑에서 일을 도모하며 진행하는 사람이다. 특히 자금 관리와 세수(稅收) 행정, 책략의 구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문장 솜씨가 뛰어나 지방 행정 수장을 대신해 대외 교섭에 필요한 서신 등 글을 작성하는 사람은 도필리(刀筆吏)라고 불리기도 했다.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책밭, 유광종 저(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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