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2.04 17:57

(2) 위기 속의 상황 판단-4

물러설 때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물러나라
후퇴의 상황에서 어설픈 미련은 금물이다
 

> 1950년 10월 31일 오후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중공군을 향해 퍼부은 포탄은 약 1만 5000발. 낯선 군대 중공군은 미군의 강력한 화막(火幕)에 발길이 막혔다. 한국군 1사단에 배속한 미 10고사포단의 야포들이 영변 북방, 운산 인근의 중공군을 향해 불을 뿜고 있는 장면이다. 미 10고사포단의 윌리엄 헤닉 대령은 1사단장 백선엽 준장과의 약속대로 지니고 있던 화력의 대부분을 쏟아 부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장비와 화력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과감하게 적을 향해 사용했다. 

 

> 백선엽 1사단장(오른쪽)이 지프의 본닛 위에 지도를 펴놓은 채 미 고문관과 작전을 숙의하는 사진이다. 백 사단장은 10월 31일 철수명령을 받은 뒤 예하 3개 보병연대로 하여금 신속하게 후방으로 빠지도록 지시했다. 미 10고사포단의 막강한 화력을 충분히 활용했다. 결정을 하면 그를 재빠르게 이행해야 하는 법이다. 한 시라도 늦췄다가는 결정적인 위기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어쩌면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를 잘 읽어야 하는 게 전부일 수 있다. 사안을 맺고 끊는 단안(斷案)이 정확해야 하고, 그를 실천하는 행위도 바위를 치는 번갯불, 전광석화처럼 신속해야 한다. 

 

> 철수하는 한국군 1사단을 호위하기 위해 북상한 미 1기병연대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이 막 참전한 뒤 처음 벌인 1차 공세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있는 미군의 모습이다. 미 1기병사단의 1개 연대가 중공군 포위에 갇혀 죽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상당수가 붙잡혔다. 그런 희생 덕분에 한국군 1사단은 중공군 포위를 피해 후방으로 물러설 수 있었다. 밤의 군대, 중공군은 1차 공세에서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1차 공세 뒤의 중공군은 병력을 후방으로 뺐다. 전선에서 느닷없이 중공군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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