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2.21 10:36

(3) 맥아더의 리더십-3

> 중공군 참전 초반의 김일성(오른쪽)과 펑더화이의 모습이다. 펑더화이가 이끌었던 중공군은 밤의 군대, 그리고 매복과 우회의 군대로 불렸다. 6.25전쟁 초반에서 드러난 중공군의 몇 가지 특징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늘 밤의 어둠을 이용했다. 낮에는 좀체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늘 우회를 좋아했다. 정면으로 다가서기보다는 늘 구석지고, 비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컴컴한 곳에 숨어 제 몸을 숨기다가 상대의 빈틈이 드러나면 바로 공격을 펼쳤다. 그런 중공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껏 명성이 드높아진 맥아더의 시야에 잘 들어올 리 없었다. 맥아더는 줄곧 오판을 했다. ‘중공군은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절체절명의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맥아더의 공세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무렵의 만주 벌판에는 새카맣게 중공군이 모여들고 있었다.

 

>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해 서울 쪽으로 향하던 무렵의 국군 북진 대열 모습이다. 북진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한 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 무렵 맥아더가 가장 크게 놓친 것의 하나가 진출 지점에 관한 전략적 고려였다. 한반도는 북부로 가면서 중국과의 국경이 크게 펼쳐진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이어지는 중국과의 경계는 최대의 폭에 해당한다. 방어하는 사람, 즉 방자(防者)의 입장에서 보면 불리함이 최대화하는 곳이다. 그 점에서 보면 방어에 가장 편한 지점이 눈에 띈다. 서쪽으로는 평양, 동쪽으로는 원산을 잇는 이른바 ‘평원선’이다. 이곳의 너비는 약 270㎞. 그러나 이곳을 넘어 압록강~두만강으로 진출하면 크기는 거의 2배로 넓어진다. 따라서 맥아더는 이곳에 강력한 방어선을 설치한 뒤 북진을 하든가, 아니면 이곳에서 일단 멈춘 뒤 차후의 공세를 면밀하게 펼쳐야 했다. 그러나 아군의 전쟁 전반을 이끌었던 맥아더 사령부는 급거 북진한 뒤 일거에 압록강과 두만강 전선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 압록강의 물을 뜨는 국군 사진.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한 국군 6사단은 한반도 통일이라는 벅찬 감격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일대 산맥에 매복한 중공군 포위의 덫에 갇힌 상태였다. 북진을 하되 만약 평양과 원산의 평원선에 강력한 방어선을 설정한 뒤 서서히 상황을 수습했다면 어땠을까. 이 점을 적지 않은 전사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공산측은 이미 한반도 참전 결정을 내린 뒤이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신중하게 평원선에 방어선을 설정한 뒤 차분한 공세를 펼치는 결정을 내렸다면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피해는 상당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의 판단은 그래서 여러 사람의 지적을 받는다. 게다가 그는 1950년 10월 25일 벌어진 중공군의 1차 공세를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소규모 개입이었을 것이고, 그나마 미군의 힘에 밀려 이미 발을 뺐으리라고 봤다. 전쟁터는 그런 조그만 실수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조금의 방심은 커다란 재앙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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