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18 14:57

‘따르릉’ 숨 가쁘게 진행되던 50분 수업이 끝나고 10분간의 휴식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혹자(담임선생님과 교장)는 이 시간을 아껴서 사용하면 더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좁은 자리에서 기지개나 펴면서 7~8시간을 아껴서 사용하느라 앉아만 있으면 공부도 안 되고 맛도 가서 머리가 멍멍하다.

고 3 때였다. 의자에서 엎드려 잠을 못자기에 점심 후 벤치에 누워 교복을 덮은 채 자고 있었다.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짜증이 나서 “아우! 뭐야?”하며 고함을 치며 일어났다. 담임선생님이셨다. 일어나서 들어가 공부하란다. 아마 쉬는 시간에 자다 깨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담임선생님일 것이다. 화가 났다. “쉬는 시간에는 놔둬! 씨!”라고 외친 뒤 다시 누워 자는 상상을 하며 교실로 끌려갔다.

한 책에 나왔던 일화가 있다. 두 농부가 있었다고 한다. 한 농부는 계속 일하고 다른 이는 간간이 쉬면서 했지만 수확은 같았다고 한다. 일만 한 농부가 그 이유를 물었다. 잠깐씩 쉰 농부는 “쉬는 동안 칼 갈았다”고 답했다고 한다. 노는 시간의 의미를 참담하게 만드는 모욕적인 이야기다.

죽을 때 야근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삶은 일하는 시간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의미조차 출세에 두는 무서운 전 왕조의 영향을 받고 있다. 조선에서는 과거에 급제를 못했거나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에게 죽어서도 후회하라는 듯 ‘학생(學生)’이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이는 죽어서 좀 쉬려는 분에게 다음 시간을 위해 공부하라는 강요이고, 죽음의 세계까지 출세와 합격 안에 있다는 뜻이다. 공부를 더 권면하기보다는 공부가 더 싫어지게 만들어주는 대목이다.

보통 독서실 입구 같은 곳에는 주자(朱子)의 유명한 문구가 붙어있다.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少年易老學難成), 순간의 시간이라도 헛되이 보낼 수 없다(一寸光陰不可輕).”

합리적으로 바라보면 이 문장은 ‘배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준다. ‘배우는 것’은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이뤄지는 인간의 ‘행위’인데 어떻게 달리 “이룰”수 있는가? 어려운 행위는 아니지만 이루기 어렵다면 특정 전문 분야의 방대한 지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해당 전문가가 알아서 이루면 될 일이지 왜 다른 직종 종사자에게까지 이루라고 강요하는가?

각기 다른 능력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자기가 정한 한 분야의 ‘공부’로만 묶어 줄 세워서 당락(當落)을 나누겠다는 말이 아닌가? 한시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은 태도이다. 그러므로 내 일도 많은데 타인의 ‘의도’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한 마디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주자의 시구는 철저히 자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시간낭비이다.

이 문구를 신봉한 조선은 비합리적이게도 사회 전부를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지식 앞에 줄 세웠고, 조선을 이은 우리 사회도 소중한 쉬는 시간에 뭔가를 준비하며 ‘낭비’하라고 강요한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엉킨 꼴이다.

확실히 쉬어야 할 시간에서의 ‘준비’는 업무시간의 낭비다. 쉬는 시간에 준비를 하면 쉬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의 명확한 구분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노는 시간에 쉬지 않으면 업무 시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업무 시간이 지니는 의미의 ‘변화’는 없어지고 업무의 ‘집중도’는 떨어진다. 긴장이 생기려면 이완이 있어야 한다. 이완이 없다면 긴장은 더 이상 긴장이 아니라 느슨한 빨랫줄이나 조율 덜 된 기타 줄처럼 엉망이 될 뿐이다.

‘집중’이라는 의미에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은 중요한 책이다. 그는 일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절정’에 이르거나 ‘최적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을 ‘몰입’이라고 하며 이 시간 동안 사람들은 순순히 의식의 흐름을 따른다고 본다. 약 절반가량이 일하는 동안 시간과 자신을 잊고 집중과 동기화의 느낌을 지닌다고 한다. 반면 여가시간에는 18%정도만 몰입을 경험하고 대부분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둔감하고 불만족스러운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집중해서 일에 성공하면 행복하다. 그러나 ‘피곤’하게 집중했다가 실패하면 허무하고 더 ‘피곤’하다. 어떤 집중도 ‘행복’이라도 일의 성패를 떠나서 ‘피곤’하다. 피곤할 때는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둔감하고 ‘불만족스러운’ 느낌”으로 몸과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 계속 집중하고 행복하면 끊어진다. 그리고 끊어지면 끝이다. 일이 보답해준다면 몰입과 행복이 동일하겠지만 일이 배신하면 차라리 몰입도가 최고인 컴퓨터게임이나 하는 게 더 행복일 것이다.

신경학자들은 사람이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30분이라고 한다. 더 오래하면 할수록 그 다음 집중이 불가능해진다고 한다. 특히 태양 빛을 받으며 걷거나 움직이면 집중에 더 좋다고 한다.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임을 확인해 준다.

50분을 일한다고 치면 처음 10분은 일을 준비하고 30분 집중한 뒤 나머지 10분을 정리하면 최고의 효율을 발휘한다. 더 해봐야 효과는 없고 머리만 둔해지다. 다음 시간은 회복하려는 몸의 요구로 멍해진다. 30분간 강도 높은 집중으로 행복을 느낀 다음 10~20분은 그저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둔감하고 불만족스러운 느낌으로 돌아다니거나 퍼지는 것이 좋다. 노는 시간에 놀아야 하는 것은 일할 때 몰입해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쉼으로써 내 몸이라는 ‘악기(樂器)’를 조율하는 일이다.

노자(老子)는 “큰 어려움을 내 몸같이 귀하게 여기라(貴大患若身)”한다. 내 몸이 없으면 일도 없고 쉼도 없고 어려움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세상이 만드는 화음을 위해 행복도, 불만도, 일도, 쉼도 모두 다 내 몸같이 여겨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