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2.19 15:12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맹자(孟子)의 상이다. 그의 대화록에 등장했던 '불원천리(不遠千里)'라는 말은 성어로 남았다. 가산 디지털역에서는 里(리)라는 글자를 알아본다.

원래의 역명은 가리봉(加里峰)이었다가 200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가산(加山)’이라는 이름은 가리봉동과 독산동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 새로 합성한 것이다. 따라서 그 유래를 따지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다. 차라리 역이 들어서 있어 전철을 개통할 때 먼저 붙었던 동네 이름, 加里峰(가리봉)을 살피는 일이 더 낫겠다.

이는 구로구 북동쪽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봉우리(峰)들이 이어져 마을을 이뤘다(加里)는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 지명 사전 등에는 그런 해설이 덧붙여져 있는 상태다. 혹은 ‘가리’는 우리말로서, ‘갈’과 함께 고을을 가리키기도 하며, 아울러 갈라진 땅의 모양을 지칭하기도 한다는 설명이 있다. 우리말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한자 동네 이름이리라는 추정은 그래서 가능하다.

옛 조선 시절 경기 지역의 시흥현에 속해 있던 동네로 일찌감치 문헌 등에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1963년 정식으로 서울 권역으로 들어앉았다. 현재는 가리봉1동과 2동으로 나뉘어져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 동네의 한자 이름에서 주목할 만한 글자는 里다. 이 글자는 우리의 한자 단어에도 자주 등장한다. 우선 대표적인 쓰임새가 ‘마을’을 가리키는 경우다. 지금도 대한민국 행정 지명 용어에는 이 글자가 많이 쓰인다. ‘~리’라고 부르는 동네 명칭이 다 그렇다. 이 점은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맹자가 위(魏)나라 혜왕(惠王)을 만나러 갔다.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위나라에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맹자를 접견한 혜왕이 이런 말을 한다.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우리나라를 찾아주셨는데, 제게 어떤 이익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그 다음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맹자는 “그런 이익만을 좇으면 좋지 않다”며 정색을 하고 그를 논박한 뒤 “이해관계보다는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숭상하라”고 한 수 가르친다. 그런 엄숙한 맹자를 혜왕이 곱게 봤을 리 없다. 그래서 맹자의 유세(遊說)는 실패한다.

그러나 혜왕이 맹자를 접견하면서 꺼낸 “천리를 멀다 않고”라는 말은 후에 성어로 자리를 잡는다. 한자로 적으면 ‘不遠千里(불원천리)’다. 우리말에서의 쓰임도 제법 있다. 과거에는 대화나 연설 중에 “불원천리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드리며…”라는 표현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里(리)는 ‘마을’ ‘동네’ ‘동리(洞里)’의 새김 외에 ‘길이’와 ‘거리’를 표시하는 경우에 더 많이 쓴다. 특히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의 거리를 가리킬 때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단위에 해당한다. 그 거리를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단어가 ‘이정(里程)’이고, 그 거리를 표시해 놓은 팻말 등이 바로 ‘이정표(里程標)’다.

옛 조선의 마을 앞에는 흔히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적은 장승 둘을 세워놓았는데, 그 장승 한쪽에 ‘이곳에서부터 서울까지는 ~리’라고 적어 거리와 방향을 표시했다. 당시의 장승이 이정표 역할을 했던 셈이다. 특기할 만한 일이나 공적을 세워 그를 기념할 만한 일이 생긴 경우를 칭찬할 때도 이 단어를 쓰곤 한다. ‘~분야에서 이정표를 세우다’라는 표현이다.

里(리)가 그런 길이와 거리를 가리키는 글자로 쓰이면서 이루어진 유명한 성어가 있다. 호리천리(毫釐千里)라는 말이다. 앞의 ‘호리(毫釐)’는 ‘털끝’ 또는 ‘아주 작은 것’을 가리키는 毫(호)에 역시 아주 작은 길이 단위인 釐(또는 厘)를 보탠 말이다. 따라서 아주 짧거나 작은 것, 미세한 것 등을 가리킨다. 뒤의 천리(千里)는 그냥 천리다. 아주 긴 거리를 뜻한다.

毫釐千里(호리천리)라는 성어의 원전은 ‘차이호리, 실지천리(差以毫釐, 失之千里)’다. 좀 어려워 보이지만, 이렇게 풀면 이해할 수 있다. 첫 출발지에서 아주 조그만(毫釐) 정도로써(以) 실수(差)하면, 저 멀리에 이를 때는 천리(千里)를 잃을 수 있다(失之)는 얘기다. 이 표현은 ‘差以毫釐, 謬以千里(차이호리, 류이천리)’라고도 쓰는데, ‘스타트에서 조금 어긋나면 저 멀리에서는 큰 오차(謬)가 생긴다’라고 풀 수 있다.

장자(莊子)는 큰 뜻을 품은 사람에게 ‘붕정만리(鵬程萬里)’라고 했다. 아주 커다란 새 붕(鵬)은 한 번 날아오르면 만리(萬里)를 간다면서 꺼낸 이야긴데, 큰 뜻을 품고 크게 세상을 보는 사람의 웅장한 뜻,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 千里(천리)나 萬里(만리) 모두 사람이 품은 큰 뜻, 나아가 길고 웅장하게 설계한 인생의 이정표를 말하는 듯하다. 비록 과장이 섞였을지언정, 그런 큰 뜻과 마음가짐을 지녀야 멀리 내다보며 길을 갈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역시 출발점에 제대로 서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리봉에서 생각해보는 인생의 노정(路程)이다.

 

<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 유광종 저, 책밭, 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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