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29 14:46

고향을 예찬하는 대중가요 가수의 솔직함이 좋다. 예전 김상진이라는 가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TV에서나, 라디오에서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아니야! 그것은 거짓말! 향수를 달래려고 술이 취해 하는 말이야!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라고 외쳤다. 나도 그 노래에 둔감하지 않았다. 서울은 삭막한 ‘타향’이라는 점, 그리고 ‘고향’은 어딘가 있어 내가 가야 할 곳이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고향이 좋아>는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이다. 누구든 오랜 타지 생활을 하다보면 고향이 그리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서울 사람 대부분이 ‘타지인’이고 서울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에게는 영원한 ‘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에게 이 노래는 불편하기 그지없기에 속으로 ‘서울이 꼬우면 가!’를 되뇌게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 향수는 낯선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패티 김 누님은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이라 노래함으로써 고향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하였지만 이도 그리 실감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고 타향에 대한 원망의 노래가 많을수록 서울이 고향일 수 없다는 생각은 더 짙어진다. 게다가 서울은 눈 감으면 코 베가는 사기꾼과 깍쟁이만 사는 곳이라고 한다. 서울에 사는 대부분이 타지 사람이니 코 베가는 사기꾼도 깍쟁이도 실상은 그들일 것이지만 욕은 서울사람이 죄다 먹는다. 고향의 의미를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욕까지 먹으며 참으려니 부아가 치민다.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생명체와 함께하는 것을 좋아하는 생명사랑(바이오필리아 Biophilia)이 본성이라고 인간을 새로 정의했다. 그렇다. 우리는 숲을 걸으면 기분이 좋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행복하고, 동물을 기르면서 왠지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래서 숲이 있고 개울이 있으며 정붙일 생명과 같이하는 시골을 마음의 고향으로 그린다. 마음속 고향의 실체가 밝혀지는 대목이다. 고향은 바로 이 자연이고 같이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문제는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인 똥물 개천에서만 놀던 사람은 푸르름을 고향으로 상상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놀다가 그냥 떠나야 할 휴가지로 여긴다는 데 있다. 이런 이들이 공기 좋은 곳에 있다 답답한 공기의 서울에 오면 크게 기지개를 켜며 산뜻하다는 듯 공해를 만끽한다. 도시의 공해 속에서 태어나 공해를 몸에 감고 성장한 공해체질의 한계다.

이런 서울태생들의 명절풍경을 잠시 엿보자. 아침에 차례 모시고 일찌감치 비비꼬며 친지 어르신에게 인사를 드리러 한 바퀴 돌다 해질 무렵에 귀가한다. 이때부터 명절업무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오락실에서 만나거나 그것도 힘들면 TV나 끼고 키득거린다. 혹 아버지 차 몰고 나와 텅 빈 서울거리를 질주하며 뻥 뚫린 ‘고향의 맛’을 만끽하기도 한다.

1977년 여름이었다. 빼앗긴 고향 서울에도 진정한 ‘봄’의 노래가 생겨났다. 바로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그것이다. 이 노래는 배신당하지 않는 아름다운 ‘나’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산울림이 노래한 고향은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로 시작한다. 잿빛의 회한이 아닌 밝은 도시가 주는 즐거움은 “아침 발걸음”과 “콧노래”로 이어진다. 즐거울 뿐 아니라 기쁨에 대한 “부푼 마음 가슴에 가득”한 곳이다. 특히 “정다운 눈길 거리에 찼네”는 서울태생만의 느낌을 잘 잡은 소절이다.

타지인의 정서적인 반감으로 만들어진 ‘무심하다’거나 ‘냉정하다’는 평가를 완전히 뒤집은 가사다. 노래가 전하는 서울의 정서는 점점 아름다워만 간다. 너무나 즐거워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네”로 표현되고, 결국에는 도시의 아름다움은 꽃이 아니라 “거릴 비추는 가로등”이 되어 “하얗게 피었네”로 정절에 이른다.

<아니 벌써>에 비해 패티 김 누나가 노래한 서울은 진정한 서울이 아니기에 찜찜하다. 서울에 무슨 종이 울리고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가? 이는 서울의 탈을 쓴 유럽의 소도시나 전원마을 같은 곳이다. 하지만 산울림은 “웃는 얼굴”이 아니라 현실적인 서울사람의 “지나치는 얼굴”의 삭막함을 정겹게 바라보고 즐긴다는 점에서 완전히 이해를 달리한다.

아마 신중현의 <미인>처럼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도 넋을 잃고 자꾸만 보고 있네”같이 서울이라는 도시가 주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인 듯하다. 전형적인 뉴요커인 빌리 조엘(Billy Joel)도 <마음속의 뉴욕(New York State Of Mind)>에서 “사람들은 휴가로 할리우드니 마이애미비치를 가지만 나는 뉴욕 일주버스를 타고 한 바퀴 돈다” “데일리메일 신문, 차이나타운이 주는 편함과 즐거움을 떠날 이유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다.

오늘날 도시가 주는 흥분은 더욱 더 짜릿해만 간다. 게다가 이제는 시골에 있다던 고향에 가도 덩그러니 아파트만 몇 채 서있다. 그토록 찬양하던 고향도 이제는 자기를 배신한 것이다. 몇 시간씩 차가 막히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는 조금 한산한 아파트가 있다는 차이를 눈여겨 볼 뿐이다.

하지만 윌슨의 말대로 우리에게 생명사랑은 본성이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구초심(首丘初心)도 그렇기에 이런 도시에만 살 수는 없다. 시골이 있을 때는 돌아갈 자연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 캠핑이 새로이 각광받는 여가생활의 종목이 아닌가 한다.

도시는 활기에 차고 즐겁지만 마음 속 갈망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하다. 더 즐겁고 편안하고 아름답기 위해서는 자연과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 자연과 사람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바로 도시에서 자연을 회복해야 한다. 서울을 고향으로 만들고 서울 가는 길을 가슴 설레는 귀향길로 만들려면 서울에서 자연과 사람을 찾아야 한다. 서울에서 자연과 사람을 찾는다면 더 이상 서울사람은 실향민이 아니리라. 이제는 도시 위에 다시 사람과 자연을 세우고 자연과 사람 위에 도시를 세울 지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우리가 인간인 한 도시는 짜릿함이지만 자연과 사람은 몸과 마음의 안정이다.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평안함 없는 짜릿함은 그저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렇다고 짜릿함마저 뭉개는 고향으로의 회귀 또한 바람직할 수만은 없다. 도시에서 징징대기만 해도 좋은 일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느긋함만을 뽐낼 수도 없다. 고향에서 도시의 현대성을 생각하고, 도시에서 고향의 푸근함을 함께 추구해야 바로 ‘일타쌍피’ 아니겠는가.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