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3.02 16:30
서울대 정문에서 바라본 관악산이다. 서울 남쪽에서 강한 불기운을 상징하는 산으로 꼽혔다. 산마루의 능선 모습이 멀리서 보면 불꽃, 즉 화염처럼 보여서다.

생김새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볼 수 있는 산이다. 해발 632m에 이르니 서울의 외곽을 둘러싼 산 치고는 결코 낮지가 않다. 이 산은 멀리서 볼 때 생김새가 장관이다. 우뚝 솟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마치 갓(冠)을 머리에 얹은 모습이다. 그래서 이 산을 순우리말로 ‘갓뫼’ 또는 ‘간뫼’로 불렀고, 한자 이름으로는 갓을 둘러쓴 산이라는 의미의 ‘관악(冠岳)’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갓이 여러 개 뾰족하게 올라온 모습은 또 마치 불꽃을 이르는 화염(火焰)과도 같다고 해서 이 산이 지닌 오행(五行) 안의 속성이 불의 성질을 가리키는 화덕(火德)을 품었다고 여겼다. 사람들은 그런 불기운이 세서 수도인 서울에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갓뫼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서울 도성의 남쪽 대문인 숭례문(崇禮門) 현판을 세로로 걸어 대응했다는 설이 있다. 아울러 광화문 양쪽에 화재(火災) 등의 재앙을 누르는 전설 속 동물인 해태(獬豸)를 배치했다는 점은 제법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한자 冠(관)은 우선 옛 동양사회에서 귀족 등이 썼던 모자를 가리킨다. 때로는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가 쓰는 모자도 일컫는다. 冠(관)과 함께 모자 앞에 구슬을 드리웠던 군왕(君王)의 모자 冕(면 면류관-冕旒冠의 글자)을 붙이면 관면(冠冕)인데, 역시 일반적인 옛 동양의 모자이기도 하고 권력자가 머리에 얹는 모자도 의미한다.

이 글자는 우리가 자주 쓰지를 않아서 그렇지, 사실은 매우 친숙한 글자다. 우선 월계관(月桂冠), 계관(桂冠) 등의 단어다. 월계관은 아주 잘 알려진 모자다. 천으로 만들지는 않았고, 월계수의 가지와 올리브 가지를 섞어서 모자 형태로 만들어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씌워주던 것이다. “월계관을 머리에 쓰다”라고 하면 어느 장소에서 가장 높이 올라가 1등을 차지한 사람을 가리킨다.

桂冠(계관)도 월계관(月桂冠)과 마찬가지 뜻이다. 단지 과거 영국에서 왕실에 속해 가장 대표적인 문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poet laureate’로 호칭했고, 동양은 이를 ‘계관(桂冠) 시인(詩人)’이라고 옮겼다. 왕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세상이었으니, 그 왕실에 속한 시인은 나라에서 으뜸의 수준에 오른 문인이다. 역시 월계관이 의미하는 1등의 새김을 담고 있는 단어다.

그렇다고 서양의 전유물은 아니다. 동양에서도 그런 말이 있다. ‘월계수 가지를 꺾다’라는 뜻의 ‘折桂(절계)’라는 단어다. 우리 옛글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말이다. 월계수는 동양에서 달(月)의 상징이다. 자세히 살필 때 달에는 그늘진 곳이 보인다.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는 곳은 달의 표면에 있는 지형(地形)의 굴곡 때문에 생기는데, 동양 사람들은 그 전체의 모습이 토끼와 월계수를 닮았다고 봤다. 그래서 달에는 옥토끼와 함께 계수나무, 즉 월계수가 있다고 여겼다.

중국 진(晋)나라 때 황제가 극선(郤詵)이라는 인물에게 스스로를 평가해보라고 했더니 “달나라 계수나무의 한 가지, 곤륜산의 한 자락에서 파낸 옥돌 한 조각 정도일 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달나라에 있는 수많은 계수나무 가운데 한 가지, 거대한 곤륜산의 옥 한 조각을 들어 자신을 낮췄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달나라에서 꺾은 계수나무 가지 하나’를 가리키는 성어 섬궁절계(蟾宮折桂) 중 ‘折桂(절계)’라는 단어는 유행을 타고 말았다. 역대 문인들이 그런 극선의 겸손을 끌어들여 ‘1등을 차지하다’라는 뜻의 단어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서양과 비슷한 뜻으로 계수나무는 ‘챔피언’의 의미를 띤다.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그래도 모자의 형식으로 만들어 우승을 차지한 사람에게 씌어줬던 습속은 동양이라기보다 서양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베를린 올림픽에 나가 자랑스럽게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서 머리에 얹었던 것도 바로 그 월계관이다.

한자 岳(악)은 큰 산을 지칭한다. 작은 구릉이나 높이가 낮은 산이 아니고, 크기가 우람하며 높이 솟은 산을 의미한다. 같은 글자로 쓰는 게 악(嶽)이다. 한국에서는 두 글자를 통용한다고 본다. 둘 모두 크고 우람한 산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산을 지칭하는 글자로는 山(산), 嶺(령), 巖(암), 峰(봉) 등과 함께 岳(악) 嶽(악)의 두 글자가 다 쓰인다. 구체적인 기준은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장인을 악부(岳父), 장모를 악모(岳母)로 적는 경우가 좀 궁금하다. 당나라 때의 일화로 알려져 있는데, 황제 현종이 연례행사처럼 벌이는 태산(泰山, 중국인이 으뜸으로 치는 산둥성의 산)에서의 제례를 치르기 위해 張說(장설 또는 장열)이라는 대신을 파견했는데, 그 사위 鄭鎰(정일)이 그 덕에 승진했다고 한다. 나중에 황제가 정일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는데, 정일이 우물거리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 하나가 “아무래도 태산의 힘이었던가 봅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그 영문을 알아차리고서는 정일의 벼슬을 원래의 자리로 돌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태산을 일컫는 岳(악)이 곧 장인을 일컫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장인은 岳父(악부)와 함께 岳丈(악장)이라고도 적는다.

산둥의 낮은 구릉지대에 우뚝 선 산이 바로 태산이다. 실제 그 산은 그리 높지 않다. 해발 1545m라고 하니 아주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주변에 큰 산이 없다. 그래서 아주 커 보이고, 우뚝 선 것처럼 비친다. 그래서 태산은 그 고유명사 외에 ‘아주 큰 산’ ‘대단한 규모의 산’이라는 뜻으로 불린다. 그런 태산에 제례를 올리기 위해 찾아갔던 황제, 때로는 그를 대신해 잠시나마 그런 제례의 주인공 행세를 했던 대신의 위상은 그래서 생겼다.

그에 기대려는 꿈을 품었던 이가 정일이라는 사람이다. 세상의 인정이 대개 그런 모양이다. 피붙이나 그 주변의 친인척(親姻戚)이라는 인연에 기대 출세를 꿈꾸는 사람들 말이다. 홀로 서려는 노력이 중요하겠다. 태산에 기댄다는 의미에서 나온 장인과 장모, 즉 岳父(악부)와 岳丈(악장) 그리고 岳母(악모)는 그래서 다 부질없다. 홀로 힘으로 굳건히 세상에 서는 사람이 멋지다. 처가(妻家)의 연줄, 나아가 개인적인 인연에 기대 공명과 부귀를 누리려는 사람은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갓뫼, 冠岳(관악)은 모든 산이 그렇듯 늠름하다. 제자리에 홀로 우뚝 서서 세월을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산은 그래서 늘 경이롭다. 아울러 우리는 그런 산을 오르면서 적지 않은 생각에 접어든다. 꿋꿋해서 의연(毅然)한 그런 산을 보며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며 배운다. 머리에 얹은 높은 모자처럼 冠岳(관악)은 늘 그렇게 멋진 산이다.

<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 유광종 저, 책밭, 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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