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16 16:00

이세돌이 알파고를 한 차례 꺾었다. 매스컴은 또 호들갑이다. 액면 그대로의, 1승만을 볼 일은 아니다. 컴퓨터 게임 한번 이겼다고 노벨상을 주자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한 이세돌의 생각의 변화가 바로 노벨상 감이라는 점을 눈여겨 보자. 바둑이라는 '고전적인 사고'를 넘어 디지털의 마음을 이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바둑이라 하기도 뭐한 것이다. 대국이란 둘이 앉아 술도 홀짝이며 한 수 물리자 우기고, 담배 연기도 뿜고, 가끔은 애처로운 마음에 져주기도 하는 즐거운 놀이다. 아무리 프로라도 바둑은 인간이 하는 놀이다. 반상 갖다 놓고 돌은 올려놨다 해도, 주고받는 즐거움이 없으니 진정한 바둑은 아니라는 말이다.

프로 대국이니 백번 양보해 바둑이라 하자. 이세돌이 대전료를 받는 만큼 알파고는 더 순도 높은 전기를 공급 받는가? 영국의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두려운 건 인공지능(AI)이 아니라 자본주의라고 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고, 재롱 피우는 알파고 뒤에 돈주머니를 열고 있는 구글이 무서운 것이다. 곰하고 힘 대결한 이세돌도 미련하기는 매한가지다.

바둑 해설을 잠시 들었다. 무슨 동양 고전 풀이 같았다. 돌 한 점 한 점의 해설이 구구절절 사자성어에 고전 인용이다. 고전을 전공한 입장에서 눈이 크게 뜨이는 대목이다. 쉬운 예로 만화와 드라마로 유명해진 바둑용어 “미생(未生)”은 도가계열의 고전 <열자(列子)>에서 처음 등장하는 단어다. 바둑에서 고전의 새로운 용도를 보았다.

요즘 고전 읽기가 유행하며 떠오르는 곳이 시카고 대학교다. 이 대학교는 당초 별 볼일 없는 삼류였다. 하지만 총장 로버트 허친스가 도입한 시카고 플랜을 통해 노벨상 수상자를 80명이나 배출한 명문 중에도 왕 명문 대학으로 발돋움했다. 그의 방법이란 간단했다. 고전을 달달 외우지 못하면 졸업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바로 100권의 고전 그레이트북스가 탄생해 우리까지 괴롭히고 있다.

시카고 대학의 예로 보듯 고전에 노벨상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한다. 시카고가 날아오를 때 하버드, 옥스퍼드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단순히 외우는 것만으로 노벨상은 힘들다는 뜻이다. 고전이 약발을 발휘하려면 단순히 외우는 것을 넘어선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 백척간두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고전이라는 게 상당히 문제가 많다. 춘향전은 청소년 성매매고, 심청전은 인신매매라서가 아니다. 우리가 읽는 대부분이 일본 번역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원래 언어가 일본어로 구르고 중국어로 구르다 보니 내용만 남고 의미나 맥락은 다 놓쳐 뼈만 남았다. 우리나라의 성경조차 중국어 번역이다 보니 웃지 못 할 오해를 교리로 우기기도 한다.

고전(古典)은 글자 그대로 옛날 책이다. 영어로는 클래식(Classic)이라 하는데 그리스와 로마가 만들어 낸 문화형식을 의미한다. 클래스(class)는 ‘나눈다’는 말로 ‘계급’과 ‘교실’이라는 뜻도 있다. 또 고전이란 ‘이야기가 있는 사전(辭典)’이다. 따라서 시대적 상황과 언어에 민감하다. 동아시아의 고전 <대학(大學)>에도 “사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는 시종(始終)이 있다. 일의 선후(先後)를 아는 것은 도(道)에 가깝다”라고 하듯 고전이란 신분의 위아래, 행동이나 일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즉 우리는 고전이라는 언어의 틀 안에서 세상을 본다.

얼마 전 고고도미사일 사드 배치와 관련해 중국 외교부장 왕이(王毅)는 “항장의 칼춤은 유방을 겨누고자 함(項莊舞劍, 意在沛公)”이라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인용한다. 이 역시 기본적인 수준의 고전 이용이다. 때문에 이세돌이 진 바둑처럼 아쉬움이 남는다.

바둑은 시작과 끝, 한 수 한 수마다 이름이 있고 사연이 있으며 길(道)도 있다. 본말과 시종을 말하는 고전과 다를 바 없다. 이세돌도 그렇게 전통적인 방법으로 배우고 익혔을 것이다. 고전으로 훈련된 눈으로 세상과 바둑판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파고가 고전의 언어와 의미로 바둑을 배웠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컴퓨터 계산에는 의미도 사연도 없다는 말이다. 대신 지금껏 축적된 모든 바둑의 기보를 가지고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따라 승률이 가장 높은 곳에 바둑알을 놓는다. 때문에 만약 정해진 길, 고정된 사고만 한다면 이세돌은 절대 알파고를 이길 수 없다. 손뜨개질 명인이 방직기계를 이길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

이세돌은 내리 지다가 알파고를 이겼을 때, 모든 해설자는 그가 파행적인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그는 3패를 통해 고전의 길을 벗어나는 법을 알았다. 고정된 사고방식을 벗어나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포석한 것이다. 알파고가 축적한 수천 년간의 길(道)에 대한 데이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금껏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길을 열어야 했다. 그렇다. 알파고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틈새를 공략하는 일은 수 천 년 간 인간이 일구어 낸 문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일본에는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 중국서도 전통의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약을 개발해 노벨상을 거머쥐었다.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없다. 그들 모두는 고전에서 길을 물었지만 그 길에 머물지 않았다. 반면 우리는 길을 벗어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일본어 번역에 치이고 중국어 번역으로 뒹굴고 있는 우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알파고와의 승리로 이세돌이 더 크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생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는 그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세돌에게 노벨상을 수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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