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23 11:10
1968년 선을 보인 영화 '전설 따라 삼천리'의 한 장면. 조선의 귀신은 애꿎은 처녀, 요즘 한국의 귀신은 공부에 치이고 사랑에 목마른 학생이 대종을 이룬다.

처녀귀신, 총각귀신, 애기귀신…. 조선시대 이야기에 주로 나오는 테마는 귀신이다. 총각귀신 몽달이는 얼굴 없는 달걀귀신이다. 어리바리하다. 점집을 주름잡는 동자신은 당돌해 보여도 엄마 품을 찾는 애다. 꿈속에 나타나는 부모는 조상신이다. 귀신에도 왕이 있다. 긴 머리에 하얀 소복을 입고 피 흘리는 처녀귀신이다. 한 맺힌 귀곡성에 세상은 얼어붙는다.

귀신이란 차마 저승에 들지 못할 한을 지닌 채 구천을 떠도는 중음신(中陰身)이다. 그래서 귀신 이야기에는 자살했거나 억울하게 죽은 사연이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부동의 1위다. 노인이 가장 많고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 자세히 보면 시대마다 사연도 다르고 귀신도 다르다.

조선은 자살왕국이었다. 대부분 효자(孝子)와 열녀(烈女), 그리고 처녀가 죽음으로 많이 몰렸다. 모두 약자다. 효자비나 열녀문을 꽁으로 따는 게 아니다. 아들이 극진한 효를 못하면 허벅지 살을 베서라도 효자로 만들었고, 청상과부 며느리는 얼굴도 모르는 남편을 따라 죽어야했다. 이들은 살해당했어도 ‘효자’나 ‘열녀’라는 타이틀은 얻었다. 그러니 진짜 억울한 존재는 처녀귀신이다.

처녀 귀신 이야기는 새로 부임하는 사또로 시작한다. 신임 사또에게 처녀귀신은 귀곡성을 울리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대부분의 부패한 사또는 귀신의 한을 듣기도 전에 겁에 질리고 양심에 찔려 죽고 만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젊고 잘난 정의의 사또는 다르다. 그는 귀신의 말을 듣고 나쁜 놈을 치죄해 처녀의 명예를 신원한다. 귀신이 아닌 사또가 잘났다는 이야기다.

유력 가문의 망나니 아들놈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버림받은 처녀는 약자다. 온 동네에 소문이 나도 항거할 방법조차 없다. 관아에 신고해보지만 묵묵부답이다. 한을 품고 자살해 귀신이 되는 길 밖에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이기에 흐느끼는 귀곡성이다.

조선의 처녀들은 그렇게 자살했고 그렇게 귀신이 됐다. 하얀 소복은 죽을 때 입는 옷이 아니라 잠옷이지만 순결의 상징으로 귀신의 ‘교복’으로 변한다. 그렇다. 조선을 짓누른 귀곡성은 짓밟힌 순결의 호소다.

일본 강점기에는 여학생이라는 새로운 여성이 등장하며 이야기가 달라진다. 양반집에서는 규수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평민들은 딸을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대부분 중인계급의 딸들이다. 여학교도 몇 없고 여학생도 많지 않았기에 여학생이란 새로 나타난 희귀종이었다.

당시 기생들이 여학생 복장을 했을 정도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배재학당에 다니던 양반집 자제는 이화학당 여학생과의 연애가 로망이었다. 한국판 사랑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한다. 우선 신분제도가 아직도 굳건했기에 여학생 신분은 어정쩡하다.

여성을 위한 직업도 없으니 학교를 나와도 취직할 곳이 없었다. 신분 차이로 결혼도 불가능했다. 교정에서 만난 사랑하는 남친과 알콩달콩 살고 싶지만 양반 출신이기에 이미 가문에서 정한 정혼자가 있다. 남은 것은 나이 많은 남자의 후처 자리뿐이다. 벼랑 끝에 몰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동반자살인 정사(情死)를 택한다. 이게 일제 때 새로운 ‘종족’이던 여학생의 슬픈 결말이다.

한국은 OECD국가 중 노동시간 1위, 최저임금은 하위 그리고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한다. 죽어라고 일하지만 월급은 쥐꼬리만 해 죽고만 싶은 것이다. 삶의 만족도나 행복 지수도 꼴찌다. 인터넷 속도나 핸드폰 사용은 최고지만 이게 삶의 만족도나 행복의 요건은 아니다. 죽고 싶은 삶이고, 자살의 충동은 늘 가까이 있는 나라다.

21세기 한국의 귀신은 <여고괴담>같이 흥행한 영화나 도시괴담의 형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도 어린 학생과 젊은 여성의 자살률이 높다. 따라서 이들 귀신 이야기가 가장 많다. 다른 점이라면 순결과 명예를 중시한 조선이나 사랑의 불꽃을 태워 정사했던 일제와 달리 현대의 귀신은 공부하는 학생이다.

도시괴담에 나오는 학생 귀신은 대부분 교복을 입는다. 교복이란 부모와 선생님을 의지하고 학교의 규율에 순응한다는 말이다. 학생을 자살로 내 몬 것은 부모의 잘못된 기대와 억압, 끝없는 경쟁을 요구하는 학교와 선생, 그리고 폭력을 휘두른 친구다. 아무도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죽었어도 학생 귀신은 교복만 고집한다. 교복은 규율이자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소복이 하얀 순결의 상징이었다면 대한민국의 교복은 가정과 사회의 보살핌을 가리킨다. 처녀귀신은 귀곡성으로 악착같이 신원했지만 학생귀신은 원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원한을 풀 능력도 없다.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야간 자습하는 순둥이다.

깊은 밤 학교 창고나 아파트 놀이터의 그늘을 유심히 보라. 누군가 교복 차림으로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학생귀신이다. 무섭고 으스스하다고 도망치지 말고 빵이라도 하나 던져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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