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4.07 18:14
서울 북쪽을 늘 늠름하게 지키고 있는 명산 도봉산의 모습이다. 도봉서원, 연산군 묘 등 둘러볼 만한 명소가 많은 곳이다. <사진=도봉구청 홈페이지>

서울의 동북쪽에 버티고 있는 산이 도봉산이다. 이 산이 왜 ‘도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뚝한 화강암으로 높이 솟은 봉우리가 유학에서 말하는 ‘도(道)’의 이미지와 흡사해 봉우리라는 뜻의 ‘봉(峰)’을 붙여 도봉으로 불렀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정도다.

조선 500년의 왕조 역사를 주름잡았던 유학의 갈래는 성리학이다. 그를 주도한 주자(朱子)의 학문 계통을 흔히 ‘도학(道學)’이라고 했다. 관념적인 색채를 입혀 교리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던 경향을 보인다. 때로는 극단적인 유교의 질서를 강조해 이념성이 강하다.

어쨌든 동양에서 ‘道(도)’라는 글자의 쓰임새는 매우 넓다. 공자(孔子)의 도, 노자(老子)의 도,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에도 모두 그런 도가 있다. 따라서 도는 말하자면 추구하고자 하는 진리 그 자체, 혹은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마침 이 글자의 원래 새김이 ‘길’이다.

조선왕조 이래 줄곧 이 산은 도봉산으로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선 태종과 세종 시기의 이 산에 관한 기사가 등장한다. 500여 년 전 이 도봉산의 모습은 어땠을까. 우선 빼곡한 산림이 있고, 그 안에 ‘숨어 사는’ 부랑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세종과 그 아들 문종 때 실록은 “거지와 부랑자, 무뢰한 등이 숨어 지낸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노비 생활하다 도망친 사람들, 그래서 일부는 산적으로 돌변키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는 얘기다. 그 옆의 삼각산(三角山, 지금의 북한산) 상황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조선왕조의 권력 심장부에서 자주 나왔다. 이어 이곳은 사냥터의 모습으로도 등장한다. 임금까지 나서는 대규모 사냥이다. 조선시대 내내 임금이 출동하는 사냥은 일종의 군사훈련과 다를 바 없었다.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짐승 몰이에 나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흔히 ‘강무(講武)’라고 했다. 무력(武)을 연구하는(講) 일종의 의식이었는데, 사실 그 내용은 임금과 군사가 함께 나서는 수렵대회였다.

군사를 동원해 훈련까지 도모할 수 있는 넓은 지역과 빽빽한 산림, 그리고 산속에 숨어사는 호랑이 등 맹수까지 있었던 도봉산과 삼각산 일대는 조선왕조가 군사훈련을 도모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 때의 기록도 남아 있다.

도성인 한양에 진입했던 왜군들의 노략질이 이곳 일대까지 미쳤던 모양이다. 산에 숨어들어간 모친과 그 딸 둘의 이야기다. 16세의 딸은 언니가 왜병에게 붙잡혀 가자 그런 모욕을 당할 수 없다면서 천 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서울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조, 지켜주는 군대가 없었던 조선의 민초들이 어떻게 왜군으로부터 유린당했는지를 어렴풋하게 짐작토록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봉은 그 이후로 이곳에 세워진 서원(書院)으로 유명해진다. 조선 중반에 성리학적인 질서를 확립하고자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그는 주자의 성리학적 이념을 철저하게 추구했던 개혁론자였다. 이를 테면 ‘도학(道學)’의 충실한 집행자였다.

그런 그의 취향이 결국 우뚝한 화강암 바위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도봉산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는지 모른다. 일부 조사에 따르면 조광조는 생전에 이 도봉산을 매우 좋아해 산의 계곡 등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도봉산이 품은 강한 기상과 조광조 가슴속에 담긴 강력한 도학자로서의 개혁의지가 서로 어울렸다는 얘기다.

결국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라는 정치적 싸움에 휘말려 죽음을 맞는다. 그의 나이 37세 때다. 그러나 그의 강력했던 정치적 개혁 성향은 후대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래서 1573~1574년에 세워진 게 바로 도봉서원이다. 1696년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였던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도 이곳에 배향한다.

그런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중반기 이후 기사에서 다루는 도봉과 도봉산에 관한 내용은 대개가 서원과 맞물려서 등장한다. 당파적인 논쟁의 차원에서 다루는 조광조와 송시열에 관한 토론 등이다.

동양의 한문 세계에서 ‘도’는 막연하면서도 매우 포괄적인 차원의 글자다. 숱하게 많은 사람이 그 ‘도’를 추구했고,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에 따라 그 ‘도’를 말해왔다. 성리학의 도는 나름대로 조선의 왕조적인 질서에 부응하면서 몸집을 키워왔다. 그러나 그 도가 도(度)를 넘을 때가 항상 문제다. 과도한 성리학적 이념에 관한 집착은 결국 조선의 쇠락(衰落)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우리가 이 시대에서 추구하고 찾아야 할 ‘도’는 과연 무엇일까. 그 점을 생각하면 그 ‘도’의 상징으로 우뚝 서서 서울을 조망하는 도봉산의 무게가 남다를 수 있다. 아니면, 산은 그저 산이로되 사람들이 그 산을 두고 자꾸 무엇인가 의미를 붙이려고 하는지 모른다. 어느 쪽이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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