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4.25 10:52
화려하게 피었다가 또 그렇듯 화려하게 떨어지는 벚꽃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는 2016년 4월의 남산길이다. 이 무렵은 꽃이 지고 신록이 더 자라나는 '홍수녹비(紅瘦綠肥)'의 형용이 어울린다.

이곳은 다음에 지나갈 양주(楊州)시의 권역에 속한다. 따라서 버드나무를 가리키는 楊(양)이라는 글자가 먼저 등장했다. 게다가 푸르름을 나타내는 綠(록)과 함께 붙어 있으니 이름 치고는 제법 운치가 있다.

자료를 찾아보면 이곳에는 조선시대 말을 키우는 목장이 들어섰던 곳으로 나온다. 말은 평범한 말이 아니라 군마(軍馬)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世宗)대왕 연간에 이미 그 이름이 등장하는 점을 보면 목장의 규모는 꽤 컸던 모양이다. 이곳의 벌판을 녹양평(綠楊坪)이라고 적었으며, 그 목장의 이름은 녹양평목장(綠楊坪牧場)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버드나무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한자는 楊柳(양류)다. 그러나 같은 버드나무라고 불러도 모양에 있어서 둘이 어떻게 차이를 드러내는지는 오류(梧柳)역에서 풀었다. 柳(류)는 축축 늘어지는 가지를 지닌 데 비해 楊(양)은 그보다 뻣뻣해서 위를 향하는 가지의 나무다.

따라서 예서 주목할 한자는 綠(록)이다. 이 글자 쓰임새는 매우 발달했다. 그로써 만들어진 단어도 즐비한 편이다. 우선은 색깔을 가리킨다. 무슨 색깔인지는 분명하다. 초록(草綠)을 떠올리면 좋다. 풀이 지닌 푸른색이다. 평화와 안정을 뜻하는 컬러여서 우리에게는 매우 친근하다.

풀빛과 녹색은 같다. 그래서 나온 말이 초록동색(草綠同色)이다. 형편이나 이해(利害)의 관계가 비슷해서 같이 어울리거나, 서로 돌봐주는 그런 사람을 가리킨다. 녹림(綠林)이라는 단어는 ‘푸른 숲’의 뜻이지만, 뜻이 돌고 돌아 결국 ‘도둑의 소굴’로 정착한다. 깊은 숲에 있는 도적들을 가리킨다. 녹림호객(綠林豪客), 녹림호걸(綠林豪傑), 녹림객(綠林客) 등이 다 그런 도적의 뜻이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녹색은 자연을 의미해 안정과 평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달리 정한(情恨)을 표시할 때도 곧잘 등장한다. 겨울 지나 봄을 맞아 펼쳐지는 신록(新綠), 푸르름이 우거져 드리우는 그늘을 녹음(綠陰), 윤기 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카락을 녹발(綠髮)로 부르는 식이다. 그러나 다른 일면도 있다. 풀이 우거진 모습은 어떤 경우에는 마음을 시리게 한다.

벌판 가득한 풀의 빛에 이별의 정서를 담은 예전 동양의 시구가 꽤 많다. 萋萋(처처)하게 바닥을 가득 메운 풀, 그 널리 퍼진 모습에 제 이별의 정한을 옮겨 싣기 쉬웠기 때문이다. <초사(楚辭)>에 등장하는 “왕손이 떠도니, 돌아오지 않습니다. 봄풀은 자라서, 퍼렇게 우거졌습니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가 대표적인 경우다.

봄풀의 색깔은 어찌 보면 푸르다 못해 처연(悽然)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그 풀의 빛깔에서 헤어짐의 애잔한 감정이 솟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綠(록)은 꼭 긍정적이거나 편안하지만은 않은 색깔이다. 예전에는 녹창(綠窓)과 녹당(綠堂)이라고 해서, 가난한 여인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었던 점도 그렇다.

중국에서 ‘녹색 모자(綠帽)’는 함부로 떠올릴 단어가 아니다. 바람피운 여인네를 둔 남자에게 “녹색 모자를 썼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유래는 판본이 여럿이라 일일이 다 소개하기는 힘들다. 단지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원(元)나라 시절, 기생이 머무는 기원(妓院)에서 허드렛일 하는 남성에게 녹색 모자를 쓰도록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붉은 등, 푸르스름한 술을 가리키는 중국 성어가 燈紅酒綠(등홍주록)인데, 번화한 유흥가 또는 화려한 나이트 라이프(night life)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뜻의 성어는 아니다. 그래도 푸르른 풀이 우거져야 뭇 생명이 자리를 잡는 법이다.

중국식 성어 回黃轉綠(회황전록)은 누렇게(黃) 변한(回) 잎이 푸르름으로(綠) 바뀌는(轉) 초봄, 綠肥紅瘦(녹비홍수)는 꽃(紅)은 야위고(瘦) 푸르름(綠)은 풍성해지는(肥) 늦봄을 일컫는 말이다. 그 말뜻이 좋건 아니건, 우리는 그런 푸르름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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