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벼리기자
  • 입력 2016.07.11 15:45

[뉴스웍스=김벼리기자] 

<上편에서 계속>

구보의 생활패턴이 담긴 데이터를 살피며 의사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이렇게 생활하면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어요. 아직 어디 몸이 아프다거나 별다른 증상이 나타난 건 아니니까 오늘은 간단한 검사 정도만 해봅시다.”

‘4번 검진실→수납 키오스크(KIOSK)’. 의사가 검진 항목을 PC에 입력하자 구보의 스마트 고글 화면에 순서가 떠오른다. 고글 너머로 보이는 병원 바닥 위로 길을 안내하는 푸른색 화살표가 덧입혀진다. 고글의 네비게이션 기능이 작동한 것이다.

현실 같은 가상과 가상 같은 현실. 강렬한 현기증에 구보는 한때 밤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공황증이 도진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가끔 그런 현상이 찾아올 때마다 고글을 벗고 눈을 감은 뒤 크게 심호흡을 한다.

<사진제공=키오스크코리아>

‘진료 및 검진 비용 총 2만5000원입니다.’

손목시계처럼 팔을 휘감은 스마트폰을 키오스크 리더기에 갖다 대자 ‘결제 완료’ 창이 뜬다. 뒤이어 ‘무료 주차권’이 내려 받아진다.

자동차에 오른 구보는 목적지를 ‘A식당’으로 설정한다. 10년 만에 연락한 대학 친구 K와 점심약속을 잡았다. 직접 운전 모드를 선택하고 양손을 핸들에 올리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주차장 차단기 앞에서 차를 멈춘다. 자동차 운영체제에도 심어진 무료주차권을 차단기가 자동으로 인식한다. 오른발을 엑셀로 옮기는 구보의 귓가에 어머니의 잔소리가 맴돈다.

“차는 네가 직접 몰아라. 컴퓨터한테 목숨 맡기지 말고.”

미국의 ‘프로그래시브(Progressive)’는 운전자의 주행거리, 평균속도 및 최고속도, 주/월간 주행시간, 주요 야간 운전 시간 등 자료를 취합해 적정 보험료를 산출하고 있다. <사진제공=프로그레시브>

얼마 전 자율주행 차량이 전복하는 사고가 잇달아 발생한 이후 관련 문제들을 여러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다루면서 어머니의 핀잔은 더욱 잦아졌다.

특히 시민단체, 제조사, 보험회사 등은 보험문제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자율주행 차량이 보편화하기 전부터 보험은 이미 뜨거운 감자였다. 운전자와 제조사 중 누가 보험을 들고 보험료를 부담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보험료 책정 기술 덕에 해당 문제는 일단락 났었다. 자율주행/직접운전 모드 중 어떤 모드로 몇 시간, 몇 ㎞를 운전했느냐에 따라 보험료를 산정하는 시스템이 보험업계에서 보편화한 것이다. 따라서 직접운전을 할 때는 운전자가, 자율주행시 제조사가 보험료를 부담하는 정도로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최근 연이은 사고 이후 자율주행모드에서도 운전자가 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 그들은 “어쨌든 모드를 선택하는 것은 운전자의 판단이다” 식의 논리를 들며 자율주행모드를 경제적 유인을 통해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아예 자율주행모드를 금지해야한다고 외치며 집회 및 1인 시위 등을 벌이기도 한다.

구보는 핸들에서 손을 놓지 않은 채 사하라에게 K의 위치를 묻는다. 조금 늦겠군. 옆 차선을 달리는 자동차에 누워있는 사람을 흘끗 보며 구보는 엉덩이를 의자에 바짝 붙인다.

“나는 지갑이 없으면 불안하더라고. 습관인 건지 아직도 들고 다녀.”

10년 만의 안부라기에는 너무 짧은 인사를 한마디 나눈 뒤 K가 불쑥 지갑을 꺼내보이며 적막을 깬다. 대학생 때 유난히 사라지는 것에 관심을 갖던 K였다. “여전하구나.” 구보는 K를 흘끗 올려다 본 뒤 다시 식탁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려 추천메뉴를 살핀다.

‘구보 씨가 좋아할 만한 메뉴들입니다.’ 식당 메뉴 중 5가지가 화면 위로 떠오른다. 지금까지 구보가 특정 음식을 주문한 빈도, 가격, SNS에 남긴 맛 평가 등의 정보를 통해 그에게 딱 맞는 메뉴를 추천하는 시스템이다. 방금 받은 간 검사 정보를 공유한 스크린 한구석에 ‘간에 좋은 메뉴’ 목록도 떠있다.

‘육개장’을 터치하자 잠잠했던 주방이 요란스러워진다. 늦은 점심 식사라 사람이라고는 구보와 K 둘뿐이다. 서빙 로봇이 기계음을 내며 갖가지 반찬을 식탁 위에 얹는다. 

 

<下편에 계속>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