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벼리기자
  • 입력 2016.07.12 15:40

[뉴스웍스=김벼리기자] 

<中편에서 계속>

주방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불 냄새를 뒤로 한 채 구보는 K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는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대화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며 에너지라고 믿는 구보다.

K는 그런 구보의 말끝마다 고개를 일일이 끄덕이며 유난스레 경청한다. 아무도 안 쓰는 지갑을 자랑하듯 내보이는 표정으로 구보의 입을 끈질기게 바라보는 K. 설마 K는 대화도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구보는 씁쓸함을 감추며 말을 잇는다.

로봇이 주문한 음식들을 올리는 것을 바라보며 구보의 말이 끊긴 찰나 K가 화제를 전환한다. 네 살배기 아들 얘기다.

“참 세상 좋아졌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요새는 장난감도 다 3D 프린터로 만들거든.”

K는 얼마 전 아들에게 건넨 생일선물을 우쭐대며 얘기한다. 한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에 ‘꽂힌’ 아들을 위해 3D 프린터로 직접 인형을 만들어줬다는 것. 물론 인형 받침대에 ‘To. Y’라고 프린트하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아직은 그 정도지만 K의 목표는 공부를 더 해 아들의 모습을 프로그램에 직접 입력해 프린트하는 것이다. “물론 이놈은 제조업체에서 만든 ‘그럴듯한’ 장난감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K의 미간에 미세하게 주름이 진다.

“처음에 3D 프린터가 상용화했을 때 사람들이 뭐라 그랬냐. 제조업체 다 망할 거라고. 그런데 지금 봐. 기술 진보에 한계란 없는 거야. 기술에서야말로 ‘임파써블 이스 나씽Impossible is nothing’이라고. 마치 평행선처럼. 추진력만 뒷받침해준다면 너나할 것 없이, 충돌할 일 하나 없이 극한으로 내달릴 수 있는 게 바로 기술 진보야.”

수많은 반론의 사례를 제시할 수도 있었음에도 구보는 K가 말한 평행선을 잠자코 떠올린다. 사라져가는 것과 다가오는 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평행선이 아닐까. 구보는 대학시절 K를 현재의 K에 덧씌워본다.

'현금 없는 사회'는 이미 진행 중이다. 스웨덴의 한 은행에 "현금 불가(NO CASH ACCEPTED)"라는 표지판이 놓여있다.

얕은 트름을 하며 K가 스마트폰을 책상 스크린에 갖다 댄다. ‘삑-.’ 간단히 결제를 마친 뒤 K는 지갑을 뒷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집에 동전도 종류별로 다 있어. 천원, 오천원, 만원, 오만원짜리 지폐들도 하나씩 다 있고.”

현금이 사라진 건 작년이었다. 지난 2020년 한국은행은 ‘동전 없는 사회’를 선포했다. 사라진 동전의 자리를 채운 것은 선불카드, 사이버머니 등이었다. 곧바로 버스에서 ‘거스름돈통’이 사라졌다. 막상 동전 없는 사회가 현실화하자 동전뿐만 아니라 현금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었다. ‘현금 사절’을 내거는 상점들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4년간의 논의, 시행착오 등을 거친 뒤 2024년. 급기야 한국은행은 ‘현금 없는 사회’를 선포했다. 기본적으로 현금을 대체한 것은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시스템하의 사이버화폐였다. 그러나 그에 맞서 일종의 ‘무정부주의’적 사이버화폐를 사용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비트코인’ 등 초국가적이고 권력분산적인 사이버화폐를 추구한다.

아직 시행 초기라 두 세력은 각자의 시스템 하에서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정재계에서는 점차 이 둘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K와 헤어지고 차에 오르자 비가 내린다. ‘강수 확률 70%. 우산 챙기시길 바랍니다’라는 사하라의 조언 덕에 우산은 미리 챙긴 터였다. 그러고 보니 사하라를 구매한 뒤로 구보는 단 한 번도 비를 맞은 적이 없다. 심지어 장마철에도. 물론 막상 비가 오지 않아 우산을 애꿎게 들고 다닌 적은 있지만 말이다. 강수 확률까지 정확히 예측하려면 몇 년이 지나야 할까.

와이퍼를 작동한 뒤 구보는 집을 나서며 열어둔 베란다 창이 생각나 사하라를 호출한다.

“베란다 창문 닫아.”

“닫혀있습니다.”

어머니가 닫으셨겠지. 걱정이 많은 어머니는 구보가 돌아올 때까지 거실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을 것이다. 간헐적으로 고개를 베란다 밖으로 돌리면서. 솟구치는 불안을 애써 가라앉히며.

AI가 빅데이터를 활용해 사람들이 선호하는 스토리라인, 캐릭터 등을 취합해 썼다는 드라마만 골라보고, 밖에 나갈 때면 늘 ‘범죄자 예방 앱’을 켜서 주위에 범죄자가 없나 두리번거리는 어머니.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라고 구보는 새삼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 K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평행선 같은 존재. 구보는 지금껏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어머니, 한 시인이 그랬듯 ‘나보다 더 젊은 엄마’의 과거와 미래를 떠올려본다.

스마트홈 시스템. <사진제공=삼성SDS>

비 내리는 주차장에서 구보는 좀 더 빠른 걸음걸이로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염려 섞인 핀잔을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를 물리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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