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상우 기자
  • 입력 2023.06.27 09:40

적정 인하폭 두고 업체들 고심…원상 복구는 싫고, 생색내기는 후폭풍 우려

정부의 라면 가격 인하 요구에 라면 업체들이 인하 수준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한 대형마트에서 한 소비자가 라면을 고르고 있다. (사진=뉴스1)
정부의 라면 가격 인하 요구에 라면 업체들이 인하 수준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한 대형마트에서 한 소비자가 라면을 고르고 있다. (사진=뉴스1)

[뉴스웍스=김상우 기자] 밀가루 가격 인하가 기정사실화되면서 라면 업계가 고심에 빠졌다. 라면 4사(농심‧오뚜기‧삼양식품‧팔도)는 정부의 라면값 인하 요구에 '명분이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핵심 원재료 가격이 내려갈 경우 버티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시장에서는 이제 라면값을 언제 내릴지, 지난해 11월 가격 인상분에서 인하분을 얼마나 반영할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2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전날 농림축산식품부는 대한제분·CJ제일제당·삼양사·사조동아원·SPC삼립 등 국내 주요 제분업체들과 간담회를 열고 밀가루 가격 인하를 협조했다.

이에 CJ제일제당은 다음 달부터 농심에 제공하는 밀가루 공급 가격을 5%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가격 인하는 판매 장려금을 높이는 방식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판매 장려금은 밀가루를 대량으로 구입하는 업체를 대상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CJ제일제당의 가격 인하가 이뤄진다면 나머지 제분업체도 속속 가격 인하에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 원자재인 밀가루 가격이 내려가면 라면 제조사들은 가격 인하를 막을 명분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오뚜기 관계자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밀가루 가격이 내린다면 라면값 인하 여건이 조성된다고 봐야 할 것”이라며 사실상 '백기투항'을 예고했다. 농심과 삼양식품 역시 라면 가격 인하 검토에 착수한 상태다.

이런 움직임은 정부의 선전포고로 시작됐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8일 “지난해 라면값이 많이 인상됐는데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정도 내렸다”며 “기업들이 적정하게 내리든지, 대응해 줬으면 한다”고 강력 주문했다.

밀가루 가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최고치를 찍었다가 올해 들어 안정세를 찾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해 5월 톤당 419달러까지 치솟았던 밀 선물가격이 올해 1분기 268달러에서 2분기 235달러, 3분기 231달러로 내림세가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업계 안팎에서는 내달 중 밀가루 가격이 인하되면 라면값도 비슷한 시기에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제 관심사는 가격 인하의 수준이다. 

앞서 제조사들은 지난해 11월 평균 10% 안팎의 인상을 단행하며 주요 제품 가격을 100원가량 올렸다. 정부는 지난해 인상분을 100% 상쇄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업계에서는 절대 원상 복귀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흐른다.

지난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라면 4사는 정부의 압박으로 라면 출고가를 3~7% 내렸다. 인하폭은 20~50원이었다. 당시 농심은 이례적으로 라면값 인하로 연 280억원 수준의 부담을 안게 됐다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라면 업계가 작년 말 인상분 100원을 다 뱉어내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그는 “그렇다고 인하하는 시늉만 냈다가는 과거처럼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인상분의) 절반을 상회하는 수준에서 인하안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을 이유로 라면 4개사에 총 136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을 예로 들었다. 3년 뒤인 2015년 대법원은 라면 담합 무효 판결을 내렸지만, 라면 제조사들은 심각한 후유증을 치렀다.

한편, 밀가루 가격 인하 움직임에 따라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은 라면을 넘어 빵과 우유 등 다른 품목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내 최대 제과 프랜차이즈인 파리바게뜨는 지난 2월 원료비와 각종 제반 비용 상승을 이유로 90여 개 제품 가격을 평균 6.6% 인상했다. 뚜레쥬르도 지난 4월 50여 개 품목 가격을 평균 7.3% 올린 바 있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