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8.08 15:16
상하이를 대표할 만한 인물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사람이 서광계(徐光啓)다. 높은 식견으로 서양의 기하학을 비롯한 선진 문물을 중국에 끌어들인 사람이다.

이 상하이를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전국시대 춘신군을 논하자니 조금 개운치 않다. 춘신군의 태생지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초나라 귀족으로 이곳을 봉읍으로 받았다는 점 외에 그가 오늘날의 상하이를 설명할 때 자신의 요소를 보탤 게 거의 없다. 그렇다면 유비의 군대를 무찔러 일약 중국 전쟁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스타 장군’으로 발돋움한 육손은 어떨까.

마테오리치(왼쪽)와 서광계의 역사적 조우를 그린 그림. 서광계는 마테오리치로부터 천문과 수학 등 핵심적인 서구 문명의 요소를 익혀 중국에 전파한 인물이다.

그 역시 대표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않다. 육손 역시 상하이가 출생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상하이에 인접한 쑤저우(蘇州)가 고향이다. 그가 오나라에서 쌓은 찬란한 전적으로 인해 화정후에 봉해져 상하이와 인연을 맺은 점은 분명하나, 그 역시 오늘날의 상하이를 대표할 만큼 자격이 충분치는 않다.
중국인 스스로도 상하이를 대표할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망설인다. 중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많은 인물이 상하이를 기반으로 활동했지만, 순수하게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요소를 자신에게 채운 뒤 이름을 얻은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하이 출생으로 중국 근대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하나가 있다.

바로 서광계(徐光啓 1562~1633년)다. 그의 직업은 무엇일까. 중국인이 정리한 자료에는 그가 ‘수학가, 과학가, 농학가, 정치가, 군사가’였다고 적혀 있다. ‘정치가’는 그가 옛 시절의 여느 중국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과거(科擧)의 길에 들어서 급제한 뒤 벼슬아치로서의 생애를 살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요한 한 두 차례의 전쟁에서도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군사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그의 이름 앞에 먼저 나열한 ‘수학가’이자 ‘과학가’의 타이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수학이 발달한 전통의 중국이었지만, 그런 중국이 결코 보지 못했던 분야를 보도록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서광계다. 아울러 그런 수학적 업적을 토대로 중국의 과학을 업그레이드시킨 사람도 바로 그다.
그의 고향은 송강부(松江府) 상해현(上海縣)이다. 지금의 상하이가 바로 고향이라는 얘기다. 그때의 상하이는 ‘십리양장’ ‘동양의 파리’라고 일컬어졌던 300년 뒤의 상하이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방에 논밭이 깔려 있고, 동쪽으로는 끝없는 바다만 펼쳐져 있던 한적한 농어촌이었다. 그는 상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를 했다.
19세 때 지방 향시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진사시에서는 거듭 고배(苦杯)를 들었다. 그는 그런 와중에서도 농지를 개간하고, 그곳에 물을 대는 수리에 골몰했으며, 그 둘의 토대를 이루는 천문(天文)과 수리(數理)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사물의 실질을 중시하며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성향을 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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