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8.12 10:29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조우를 이야기할 때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왼쪽)와 중국인 서광계의 만남이다. 그를 표현한 아주 유명한 그림이다.

 그런 그가 1593년 무렵 처음 서양의 선교사와 접촉한다. 서양의 선교사는 카타네오(L.Cattaneo)라는 인물이었다. 서광계는 그로부터 처음 세계지도를 봤다고 한다. 중국 외에도 드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포르투칼 출신의 스페인 항해사 마젤란이라는 인물이 지구를 돌아 항해함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사실도 들었다.

그로부터 다시 7년 정도가 흘렀다. 이번에도 그는 서양의 한 인물을 직접 찾아간다. 바로 마테오리치(1552~1610년)였다. 마테오리치는 일찌감치 중국에 들어와 선교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국어를 제대로 익혔고, 전통 학문의 바탕인 한학(漢學)에도 조예가 깊어 그는 당시 중국에서 이름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런 마테오리치를 난징(南京)으로 찾아간 서광계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마테오리치는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던 서광계의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마테오리치는 자신이 중국어로 번역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종교 서적을 건넸다고 한다. 그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어쨌든 3년 뒤에 서광계는 자신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마테오리치가 있던 난징으로 가서 천주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 점이 바로 ‘계기(契機)’였던 듯싶다. 1607년 마테오리치는 그 유명한 <유클리드 원본>의 내용을 서광계에게 전수한다. 나중에 서광계는 마테오리치와 함께 그 책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해 <기하원본(幾何原本)>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다. 이틀에 한 번씩 마테오리치는 서광계에게 그 내용을 강의했고, 일찌감치 실학(實學)의 취향이 농후했던 서광계는 마테오리치가 전하는 지식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흡수한다. 그리고 둘은 마침내 책을 완역하기에 이른다.

문명사의 흐름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마테오리치를 만난 서광계로 인해 중국, 나아가 동양의 수학사에 기하학의 개념과 시각이 처음 옮겨졌다는 사실의 중대한 의미를 말이다. 그 전까지의 중국 수학은 대수(代數)가 주류를 이뤘다. 그것도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꼽힐 정도의 대수 수준을 만들어낸 곳이 중국이다. 그러나 ‘평면’ 지향의 대수가 ‘입체’의 기하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은 중국 수학, 나아가 동양 수학사에서는 일종의 미스터리다.

서광계의 번역을 거쳐 나온 평행선(平行線), 삼각형(三角形), 직각(直角), 예각(銳角), 둔각(鈍角) 등은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는 기하학 개념이다. 아울러 기하(幾何)라는 단어 자체도 마테오리치가 들고 온 유클리드 원본 내용 중의 ‘Geo(측량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다.

그의 업적은 다양하다. 나중에는 천문에 깊이 관여해 청나라 천문 역법에 관한 토대를 형성했고, 농법(農法)과 무기 및 화약 제조에도 발을 들였다. 왕조 시대의 문인 관료로 큰 공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관찰에 불과하다. 그를 통해 서양 수리와 천문, 물리, 농법 등이 중국에 접목됐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 점은 어찌 보면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의 커다란 조우(遭遇)였던 셈이고, 서광계는 그 접점을 만든 사람일 것이다.

그 서광계가 태어나고 자랐던 터전은 지금의 상하이시에 쉬자후이(徐家匯)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가 지방 향시에서 급제한 뒤 진사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면서도 끊임없이 농법 개량에 골몰했던 현장이다. 그는 죽어서 이곳에 묻혔고,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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