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1.09 14:56

중국 서남부의 거대 분지 쓰촨은 원래 순수한 의미의 ‘중국’이 아니다. 중원에 사는 중국인들이 ‘오랑캐’가 사는 곳이라고 경멸했던 지역이다. 그 원래의 주인을 따지자면 내용은 좀 더 복잡해진다. 우리가 늘 중국을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해 한족(漢族)에 의한, 한족(漢族)만을 위한, 한족(漢族)의 땅이라고 중국을 생각하지만 실제 모습은 아주 다르다.  

1940년대에 한국의 시인 미당 서정주가 발표한 <귀촉도(歸蜀途)>라는 시집이 있다. 1970년대 한국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전설 한 토막이 그 모티브다. 옛 쓰촨 땅에 있었던 촉(蜀)나라의 망제(望帝) 두우(杜宇)라는 인물이 신임하던 부하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나중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뒤 숲에 들어가 피를 토하며 울다 죽었다는 전설이다.

이 두우라는 인물은 우리가 관심을 더 두고 볼 존재다. 그는 아주 오래 전 이곳 쓰촨에 자신의 나라를 세웠던 사람이다. 과거 왕조의 권력자가 지니는 아주 큰 고민의 하나가 바로 치수(治水)다. 물을 다스리는 작업 말이다. 농사가 국가경제의 근간을 이뤘던 왕조에서 이 치수는 아주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정치 행위다. 

물을 잘 다스려야 하천의 범람을 막을 수 있고, 하천의 범람을 잘 막아야 농사를 이어갈 수 있다. 농사를 잘 이어야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아울러 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해 국가의 재정을 튼튼하게 펼칠 수 있다. 두우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마침 이곳 쓰촨은 여러 굵은 하천이 지나는 지역이다. 당연히 물의 범람도 잦았을 법하다. 

치수 작업에 고민을 거듭하던 두우가 하루는 신하들과 물가에 나갔다. 역시 치수를 위한 시찰 성격의 거동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강의 하류에서 시체가 하나 흘러왔다. 그를 건지게 했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그 시체가 살아났다. 이름을 물으니 별령(鱉靈)이라고 했다. ‘자라(鱉)의 정령(靈)?’ 이름 한 번 희한했다. 게다가 하류에서 상류로 ‘떠올라’ 왔던 점도 괴이했다.  

그 연고를 물으니 별령은 “이웃 초(楚)나라에서 왔는데 또 물에 빠졌던 모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두우 측이 물었다. “너 방금 죽지 않았었냐”라고 말이다. 대답이 아주 별났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이상하게 물에 빠졌다가 죽었어도 곧 살아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였다. 그러나 두우의 그것은 “…!”였다. 속으로 퍼뜩 ‘이 녀석을 치수 작업에 동원하면 그만이겠는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마음씨 착한 두우는 별령을 치수 작업의 책임자로 세웠다. 물에 빠져도 죽지 않으니 치수 작업에 이만한 적임자가 따로 있을 수 없을 터였다. 별령은 결국 신나게 치수 작업에 나섰고, 두우는 모든 권력을 그에게 선물로 줬다. 그러나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둘은 아내와 여러 가지를 두고 다툼을 벌였던 모양이다. 결국 두우는 별령에 밀려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는 숲으로 쫓겨났다고 했다. 그리고 매일 울다가 마침내 죽고 만다. 

두우가 울다 죽은 뒤 그 혼령은 새 두견(杜鵑)으로 태어났고, 토했던 피는 되살아나 두견화(杜鵑花), 즉 진달래로 피었다는 내용이다. 새 두견은 소쩍새, 접동새, 또는 불여귀(不如歸), 귀촉도로 불린다. 두우의 피를 머금고 피어난 진달래는 두견화로 불린다. 그 두우가 살았던 곳이 지금의 쓰촨이다. 두우는 망제(望帝)로도 부르고, 그의 나라는 고촉국(古蜀國)으로 적는다.  

미당 서정주는 그런 전설의 한 토막을 끌고 와서 시를 지었다. 그 시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 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 만리”로 시작한다. 한반도로부터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巴蜀(파촉)’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巴(파)와 蜀(촉)이 결국 옛 쓰촨 지역을 부르던 명칭이다. 

1980년대 발굴한 쓰촨의 삼성퇴 유물. 옛 촉나라 망제 두우의 전설과 관련이 있으리라 보이는 물건이다. 전설 속 두우 또한 눈이 튀어나오고,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북방의 청동기와는 아주 다른 양식이어서 중국 문명의 다원적 요소를 설명하는 유물이다.  

 

1980년대 발굴한 쓰촨의 삼성퇴 유물. 옛 촉나라 망제 두우의 전설과 관련이 있으리라 보이는 물건이다. 전설 속 두우 또한 눈이 튀어나오고, 귀가 아주 컸다고 한다. 북방의 청동기와는 아주 다른 양식이어서 중국 문명의 다원적 요소를 설명하는 유물이다.

그렇다고 같은 쓰촨 출신인 덩샤오핑을 두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주인이 바뀌고 또 바뀌고, 거듭 바뀌는 역사가 쓰촨의 땅에서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두우의 후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어도, 이 지역에 흘러든 수많은 사람들과 섞이고 섞여 지금은 겉으로 내세울 수 있는 정체성만큼은 완전히 사라졌다. 

단지 현재 쓰촨 도회지인 청두(成都)로부터 차로 1시간 정도 달려 도착할 수 있는 광한(廣漢)이라는 곳에 있는 삼성퇴(三星堆)라는 박물관에 흔적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커다랗게 툭 튀어나와 있는 눈, 비정상적인 코, 그리고 매우 큰 귀를 지닌 기이한 모습의 청동 마스크 수 천여 개가 있는 이 박물관에서 우리는 두우의 전설을 희미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1986년에 고고학적인 발굴로 처음 알려진 이 삼성퇴의 유적과 유물은 세상을 놀라게 만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신석기 시대, 그로부터 다시 한 걸음 나아간 청동기 시대에 존재하며 중원 지역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보였던 문명성(文明性)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중원의 청동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식과 조형(造形) 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는 중국 문명의 단일성을 거세게 흔드는 증거로 자리를 잡고 말았다. 

두우는 어림잡아 중국 춘추시대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 이후 지금의 쓰촨은 파촉(巴蜀)으로 불렸다. 현재의 충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지역이 파(巴), 서부 광활한 평원지역이 촉(蜀)이다. 그 파촉의 지역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유명한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 등이 들어와 촉한(蜀漢)을 세우면서 ‘해를 보면 짖는 개’가 있던 쓰촨은 본격적으로 북방 중국인들의 차지로 변한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시황의 진(秦)나라 때도 이곳이 판도에 들었지만, 중원 세력의 본격적인 유입을 거론하기에는 일렀다. 한(漢)에 들어 중원 지역의 인구가 유입하면서 중국의 색깔이 번지더니, 결국 <삼국지> 유비가 이 땅에 촉한(蜀漢)이라는 왕조를 세우고 북부 중국 세력과 다툼을 벌이면서 그 색깔이 훨씬 더 깊어졌다. 
쓰촨에는 그 이후로도 인구의 끊임없는 유입이 벌어진다. 가장 강성했던 당(唐)나라 때의 쓰촨은 당시의 최고 이민(移民)지역이기도 했다. 식량이 풍부한 곳이었으니 중원 등의 지역에서 전란이 벌어지거나 대규모의 가뭄과 홍수로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굶주린 사람들의 행렬이 이곳 쓰촨을 향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아울러 당나라 이후 활발하게 벌어지던 서역(西域)과의 교역이 전란 등으로 인한 실크로드 중단 등의 국면을 맞을 때는 쓰촨을 통해 티베트 고원~인도~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또 다른 실크로드가 열리기도 했다. 고비와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가는 북부 실크로드 대신 쓰촨 경유의 남부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이 지역으로의 인구 유입은 더 활발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의 원(元)에 저항하면서 남부지역까지 밀렸던 남송(南宋) 때의 전쟁, 만주의 청(淸)에 저항했던 명나라 잔존세력의 저항 등으로 쓰촨 일대가 다시 잔혹한 전쟁터로 변하면서 인구가 급감하는 현상도 빚어졌다. 그런 전쟁을 겪은 뒤 인구가 줄면 반드시 바깥 지역의 이민행렬이 이어졌고, 왕조가 나서서 인근의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장시(江西), 광둥(廣東)의 인구를 쓰촨으로 대거 이동시키는 조치도 취해졌다. 

이는 결국 쓰촨의 끊임없는 인구 이동, 그리고 각기 다른 지역의 문화가 한 데 서로 크게 섞이는 혼융(混融)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에 따라 쓰촨은 다양한 지역의 문화와 인구가 크게 어울리는 지역으로 유명했다.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책밭 출판사,유광종 저(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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