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9.19 10:56
조선시대 역참인 양재역에 달린 세 마을을 함께 일컫는 명칭이 바로 역삼(驛三)이다. 그곳에 흐르는 양재천은 잘 가꿔진 생태환경으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명소로 변했다.

고려에서는 이 역참을 관리하는 우두머리로 역승驛丞을 뒀다. 22개 역도를 담당하는 역승을 두고 그 아래 각 역을 관장하는 역장驛長을 감독하면서 이끌도록 했다. 조선 중엽에 들어와서는 이 명칭이 찰방察訪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문관文官으로서 종6품에 해당하는 외관직外官職이었으며, 역시 고려 시대의 역승처럼 각 역의 역장을 감독하는 직위였다. 마관馬官 또는 우관郵官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같은 역참이라고 할지라도 찰방이 머무르는 곳은 규모나 인원 등에서 다른 일반 역참보다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참의 찰방이나, 그 밑에서 각 역을 직접 관장하는 역장은 수고로움이 적잖았던 모양이다. 오가는 신분 높은 관리나 귀족, 그리고 현지의 관아官衙를 좌지우지하는 관료에게 적잖이 시달렸던 듯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그런 폐해를 지적하고 시정하려는 내용의 발언이 자주 등장한다.

아울러 역참에 준비했던 말 가운데 좋은 말과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말을 놓고 자신의 이해에 따라 차별적으로 말을 제공하는 역참 관리의 못된 관행도 등장한다. 각 역참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역장의 명칭은 지금 철도로 운영하는 현대 기차역의 ‘역장驛長’과 이름이 같으니 이 점이 흥미롭다. 그 역장 밑에서 일을 하는 사람 중 아전衙前 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역리驛吏라고 적었고, 때로는 관군館軍‧ 일수日守‧ 서원書員‧ 조역백성助役百姓으로도 불렀다.

그 밑에서 일을 하던 병졸들을 역졸驛卒로 불렀다. 그와 함께 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듯하다. 역노驛奴와 역비驛婢, 역보驛保라는 이름도 등장한다. 찰방察訪이 머무는 커다란 역참의 경우 역리의 수는 많을 경우 수 백 명에 달했을 정도라고 한다.

조선 중반 무렵 지금 경남에 있던 창원도호부의 ‘자여’라는 이름의 역참을 예로 들어보자. 이곳은 인근의 12개 역참을 관할하는 찰방察訪이 있던 곳이다. 위치는 창원에서 동쪽으로 8㎞ 거리에 있었다. 현재 창원시 동읍 송정리다. 동쪽으로 김해 생법역이 8㎞, 서쪽으로 신풍역이 4㎞, 근주역이 14㎞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안민역, 북쪽으로는 김해 대산역이 있다. 거리는 약 12㎞였다. 역참에는 큰 말 2필, 보통 말 2필, 짐을 부리는 말 14필이 있었다. 역리驛吏는 944명에 달했으며, 역노驛奴와 역비驛婢는 78명과 37명이었다.

찰방의 업무는 복합적이었다. 일대 역참 몇 곳을 총괄하면서 자신이 머무는 역참을 관할하는 역장 역할도 맡았다. 교통과 통신 업무에 역참을 오가는 높고 낮은 각 관료에게 교통편인 말과 숙식 상의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이었다. 유사시에는 병력도 동원할 수 있었다.

역리는 일반적인 역참의 공무를 집행하는 일을 맡았고, 역노와 역비 및 역보 등은 역참의 모든 잡일을 담당했다. 역참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지급한 토지가 ‘역둔토驛屯土’다. 여기서 나오는 소득으로 역참의 경비를 해결하라는 취지였다. 이런 조선의 역참 제도는 1884년 고종이 서울에 우정총국郵政總局을 만들어 현대적인 통신 우편 제도를 실시하면서 사라져갔다.

역원驛院은 역참의 시설과 함께 숙박시설을 가리키는 院(원)을 함께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 서울의 경우 이태원梨泰院, 홍제원弘濟院 등의 명칭이 그에 부합하는 시설이다. 역참은 기본적으로 떠나고 도착하는 관원들에게 교통편과 함께 숙식의 편의를 제공한다. 숙박에 해당하는 시설인 院(원)은 따라서 역참과 거의 붙어 있거나, 적어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어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院(원)은 삼국시대 말에 일찌감치 등장했다고 보이나, 고려 때의 역참 제도에서는 잘 살펴지지 않는다. 대신 고려 성종 때에 공무 여행자를 위해 설치한 관館이 등장한 뒤 고려 말까지 존속한 것으로 나온다. 어쨌든 역참 제도의 일환으로 院(원)을 본격적으로 운용한 시기는 조선 초기다. 그러나 16세기 말부터 점차 사라져 조선 후기에는 전국에 100여개 정도 시설만 남았다가 점차 주점酒店 또는 주막酒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말죽거리 또한 그렇게 양재라는 역참 시설에 붙어 있던 마을로서, 역참에 필요한 여러 기능을 보조했던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죽거리의 이름에 관한 설은 여럿이다. 우선 서울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양재역을 들르면서 이곳에서는 주로 그에 필요한 말죽을 쑤어서 제공했다는 설명이 있다.

다른 설명은 조선의 임금 인조仁祖가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남행할 때 이곳 양재역을 지나면서 말죽거리 인근에서 말 위에 올라탄 채 아랫사람들이 끓여 바친 죽을 마셨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는 내용이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 남녘에서 서울로 향하는 사람이 대개 다 이곳에서 묵거나 쉬어갔던 곳이니 사람의 왕래가 자고로 많았던 땅이다.

지금은 양재천 일대가 강남 개발붐에 편승해 땅값이 치솟고 또 치솟아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으니, 말죽을 끓이던 변변찮음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환골탈태換骨奪胎의 큰 변화를 맞았던 셈이다. 이곳을 거쳐 갔던 그 수많은 조선의 인물들은 이 땅에 묻혀 있던 황금의 기운을 읽기는 읽었을까.

그러나 그 땅 기운보다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환경의 영향이 더 클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이 땅에 많은 변화를 부른다. 그런 변화를 먼저 읽으면 발흥勃興치 않을 까닭이 없을 것이요, 그 변화에 둔감하다면 시세時勢에서 뒤떨어지지 않을 재주가 없다. 하지만 그 또한 멀리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이 세상 모두를 황금으로 잴 수는 없지 않은가. 건강함과 물욕物慾에 가리지 않는 담담한 마음도 황금만큼 중요하고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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