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21 16:30

한국인으로서 중국에 사업이나 여러 일로 다녀본 사람들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중국인들이 “우리는 친구(朋友)” “우리는 형제(兄弟)”라고 하는 경우다. 낯선 외국인과 만나 정감의 깊이를 더 하려는 중국식의 노력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말은 좋다. 친구는 아래 위의 관념이 들어 있는 말이 아니라서 그렇다. 다음 말인 “우리는 형제”라고 할 때 가끔은 문제가 발생한다. ‘형제’ 역시 ‘친구’에 못지않은 말이다. 오히려 피를 나눈 혈족(血族)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어서 친구에 비해 더 가까운 사이를 지칭하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아래 위의 상하(上下), 높고 낮음의 존비(尊卑)라는 개념이 섞여 들어 있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얘기다. 높은 위치에 있는 쪽이 형(兄)이고, 그 아래를 이루는 존재가 동생인 제(弟)다. 혈족으로 집단을 이루며 그 관계의 형성에서 늘 높고 낮음을 따졌던 종법(宗法)적 질서를 구성했던 중국에서 이 ‘형’의 지위는 결코 가볍지 않다.

형은 남성 위주의 혈계(血系)로 축선을 형성했던 종법질서에서 함께 피를 나눈 형제자매 사이에서 늘 탑(Top)에 있었다. 한 가족의 질서를 이루는 정점은 아버지가 우선이다. 그 위의 할아버지, 다시 그 위의 할아버지로부터 죽 이어지는 질서였다. 같은 세대의 형제자매 중 꼭짓점은 늘 맏형이 맡았다.

할아버지 형제자매 중의 맏형이 형성한 정점을 다음 세대인 아버지 형제자매 중의 맏형이 이어받고, 다시 내 형제자매 중의 맏형이 또 그를 물려받는 식이다. 그로써 정실부인의 첫째 남성 형제가 적장자(嫡長子)로서 집안의 정점을 이루는 게 종법질서의 핵심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안은 형이 집을 이끈다. 모두 그에 복종해야 했다. 종법이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던 옛 동양사회에서는 함부로 넘어섰다가는 자칫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불문율이었다. 그러니 형의 존재는 아주 무겁다.

필리핀에서 온갖 기행과 험담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자 국가주석인 시진핑(習近平)은 두테르테를 향해 “우리는 형제”라고 했다. 상당한 친근감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인들이 외국인을 향해 ‘형제’라는 말을 사용할 때의 의미에 민감하다.

그럼, 누가 형이란 말인가? 이 물음을 비켜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형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은 매우 당연하게 여긴다.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으며, 펼칠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다른 누구보다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본 뉴스웍스의 인기 칼럼 ‘이호영의 덕후철학’이 엊그제 지적했듯이, 중국의 ‘형제’라는 수식은 영어를 사용하는 두테르테 대통령에게는 ‘brother’로 옮겨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중국인의 이 레토릭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brother에는 아래 위, 높고 낮음의 개념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자 문맥에 밝았다면 두테르테는 이 말에 한 번은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다. ‘누가 형이란 말인가?’라는 의문 때문이다. 그러나 한자와는 거리가 먼 두테르테는 ‘그냥 그런가 보다’면서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남중국해 문제로 날카로운 대립각을 이루던 필리핀이 두테르테의 갑작스런 결심으로 중국과의 새 밀월관계에 들었다. 중국의 노련한 외교력이 거둔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은근하게 친밀감을 과시하며 시진핑이 언급한 ‘형제’는 그 정점에 해당하는 대목이랄 수 있다.

동생은 형의 말을 가능하면 그냥 들어야 하는 종법적 질서의 아래 위, 높고 낮음의 틀로 필리핀을 묶어두는 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외교는 그런 노련성이 돋보인다. 정감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영역으로 상대를 이끈 뒤 큰 틀로 관계를 형성하는 책략 말이다. 제 이익과 자존심을 다 세웠고, 상대의 잇속을 채워주는 데도 성공했으니 말이다.

두테르테는 자신이 필리핀에서 벌이고 있는 과격한 마약사범 단속에 인권문제를 들어 반대한 미국이라는 원래 ‘형’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서는 새로운 ‘형’을 맞을 채비다. 제 이익을 먼저 내세우는 국제관계의 냉정한 룰을 따지면 크게 탓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의 웃음소리가 제법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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