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기 교수
  • 입력 2018.09.17 10:09
김태기 단국대 교수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합의 대화에 노동계 특히 민주노총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지극정성이다. 김대중 정부가 내건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의 간판도 노동계를 끌어들인다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바꾸었다. 이렇게 한다고 사회적 합의가 가능해질까? 사회적 합의를 했다고 노동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사회적 합의정책의 역설을 유념해야 한다. 정부가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적 합의에 매달릴수록 실패할 가능성은 높다. 오히려 노동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그랬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사회적 합의에 희망을 걸고 지금까지 관여해왔던 필자의 30년 경험이기도 하다. 노사정 모두 사회적 합의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없으면 합의가 불가능하고, 가능하다해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하자고 노사단체 특히 노동계를 끌어당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계가 키(key)를 잡고 있는 구조적 노사갈등을 해결한다고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도 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골치 아픈 노동문제를 단번에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국민에게 심어주기 좋고, 사회적 합의가 안 되더라도 생색은 낼 수 있어서다. 이러다보니 사회적 합의에 대한 노사의 신뢰가 낮다. 경영계는 두말 할 것도 없고 노동계 중에서 민주노총은 더 회의적이다. 경영계는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 한다는 불안감, 노동계는 정부의 들러리나 서는 것 아니냐는 피해의식이 앞선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대화를 하더라도 겉돌 기 마련이다. 이러면서 사회적 합의정책은 30년 가까운 허송세월만 보내면서 공전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망가질 때로 망가졌다. 노동시장은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졌고 일자리와 소득불평등은 악화됐다. 대기업 고용비중 10%, 노동조합 가입 근로자 10%,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10대90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는 기술혁신, 세계화, 고령화라는 시대적 과제는 외면하고 당장의 이해관계를 다투는 문제에 힘을 쏟았다. 노동계는 사회적 합의 대화에 참여하는 대가로 교섭력을 키우고 임금인상과 고용보호 그리고 불법 파업에 대한 보호막까지 챙겼지만 경영계는 건질 것이 없는 자리였다. 게다가 국민의 눈치를 봐야하고 노사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린 노동법 문제가 사회적 합의의 주된 의제다보니 정치권은 부담을 피하는 수단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용했다. 사회적 합의정책이 정치화되면서 노동시장 법제도는 시대 흐름과 더 동떨어지고 국민 다수의 이익과 배치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주객이 전도된 비정상적인 사회적 합의정책을 언제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노사가 합의할 수 없는 성격의 문제라면 노사의 의견을 듣고 정부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맞다.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노사단체를 떠밀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도 정부가 노사단체와 진지하게 대화하지 않고 정치일정에 맞추어 밀어붙이는 사회적 합의는 불신만 키운다. 산업과 노동시장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사회적 합의는 더욱 어렵다. 노사 모두 내부적으로는 업종, 기업규모 등에 따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 특히 노동계는 대기업 정규직에 치우쳐있고,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으로 나누어진데다 계파갈등까지 작용해 사회적 합의를 위한 대화에 나선다 해도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 노동정치가 지배하는 구조에서 정부가 노동계의 요구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사회적 합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따라간다면 10대90사회가 고착되어 경제는 물론 정치도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사회적 합의정책은 어디로 가야하나?

사회적 합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정책부터 지양해야 한다. 노사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사회적 합의는 그중의 하나라는 점, 사회적 합의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점부터 인식해야한다. 사회적 합의를 성공적으로 활용하는 나라는 노사의 구조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노동시장 환경 변화에 따른 사회 계약의 개선을 목표로 삼았다. 미국이나 영국 등 자유 시장경제국가는 노동시장 환경 변화에 따른 갈등을 노사자치주의에 입각해 해결하는 것이 사회 계약의 원리다. 노사 당사자들이 자율적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갈등을 신속하게 해결하고 합의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 덕분에 노동시장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 높아 실업률은 낮고 경제성장률이 높다. 경제 규모가 크고 산업과 노동이 다양할수록 노사자치주의에 입각한 사회 계약이 효과적이다.

사회적 합의는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유럽에서 많이 활용된다. 노사 단체가 단위 사업장의 갈등해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사회적 조합주의(corporatism)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회 계약은 노사관계 안정화에 효과적이지만 노동시장을 경직화시킬 가능성도 크다. 같은 유럽이라도 북부와 남부는 사회적 조합주의가 전혀 다른 특징을 보였다. 독일과 스웨덴 등 북부 유럽의 조율 시장경제국가는 노동계의 사회적 책임의식이 크기 때문에 사회 계약이 유지된다. 노동계는 고임금을 받는 근로자가 양보해 저임금 근로자를 배려한다. 이러한 과정이 공식성을 띄는 것도 아니다. 반면, 이태리, 스페인 등 남부 유럽의 혼합 시장경제국가는 노동계가 근로자 내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어렵다.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주도하게 되고 그런 만큼 공식성이 강하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북부 유럽은 노사관계가 안정적이고 노동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한다. 반면, 남부 유럽은 한국처럼 노사관계가 불안하고 고용관행이 경직적이고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심각하며 초고실업사회가 지속된다.

우리나라는 남부 유럽보다도 사회적 합의 풍토가 척박하다. 노동계에 대기업 정규직노동조합의 입김이 너무 강해 이들의 이익과 반하는 사회적 합의 대화조차 어렵다. 대화를 한다고 해도 의제와 토론도 이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가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이익에 반하기 십상이고 사회 계약의 개선도 기대하기 어렵다. 대기업 노동조합이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는다면 사회적 합의는 오히려 득보다 실이 크다. 노사갈등을 해결하는 규칙 등 노동시장의 제도에 대한 갈등은 노사 당사자가 아니라 정부와 국회가 해결하는 것이 맞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한다면 노사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는 등 대화 촉진 기능에 주력해야 한다.

일자리와 소득불평등문제를 해결하는 사회 계약이 필요하다. 기술혁신과 세계화 등 노동시장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능력을 키우는 일이 시급하다. 제도와 정책을 바꾸고 사람의 의식을 끌어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적 합의를 활용하려면 의제부터 공정하게 설정해야 한다. 또한 사회적 합의의 역설을 최소화하려면 신뢰 구축에 필요한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야 한다. 첫째, 개별 사업장의 갈등은 당사자들이 자율적으로 해결하고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둘째, 법령과 예산에 대한 갈등은 노사단체가 해결과정에 참여하되 정부가 양측의 의견을 반영하여 최종 결정한다는 원칙이다. 셋째, 사회적 합의 대화에 참여하기로 해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측은 불리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원칙이다. 망가진 노동시장을 정상화시키려면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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