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2.07.13 15:26
고 이병철(왼쪽부터) 삼성그룹 회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진제공=현대아산·삼성전자)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대기업 다녔던 홍모 있잖아. 명예퇴직 후 사업한다고 몇억원 날리고 1년 쉬다가 지난 봄에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했데. 24시간 교대근무조가 월별로 바뀌어 비번일 땐 모임에 나올 수 있다고 하더구만. 월 230만원 가량 벌고 있데. 집에 계속 있으니까 마누라 눈치 보여 겨우 직장 잡았데."  

"나도 퇴직한뒤 고시원 차렸다가 쫄딱 말아먹었잖아. 아는 형님이 구청 자활근로사업단에서 청소 일을 하는데 70세가 넘었는데도 계속 출근해. 근로능력이 있는 저소득층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주는 것이라는데 나도 참여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

"쥐꼬리만한 국민연금이라도 나온다지만 대령으로 전역한 김모의 군인연금 수령액과는 비교도 안돼. 우리 나이에 나갈 직장이 있다면 그게 어디야. 최저임금을 받지 못해도 어때. 위험하지 않고 그리 힘들지만 않다면 어디든 나가서 땀 흘려야지."

1975년 고교에 입학, 재수를 거쳐 1979년 대학에 입학한 친구 3명이 최근 만나 각자 안부를 확인하고 다른 친구들의 근황을 전하면서 나눈 대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한눈에 보는 연금(Pensions at a glance 2021) 보고서에도 고령층이 먹고 살기 위해 생업전선에 뛰어들고 있는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 노인들은 소득의 52%를 근로소득에서 메우고 있다. 노인 인구 중 중위소득의 50%(상대빈곤선)이하인 사람의 비율을 말하는 상대적 소득 빈곤율 평균은  43.4%로 OECD 회원국 중 1위다. 한국 다음으로 라트비아(39.0%), 에스토니아(37.6%) 순이다. OECD 평균 수치는 13.1%에 불과하다.

고령층의 어려움은 통계청 발표로 재차 확인된다. '2022년 6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 6월 취업자는 2847만8000명으로 지난해 6월보다 84만1000명 늘어났다. 연령별로는 60세 이상이 47만2000명으로 전체 증가자의 56.1%를 차지했다. 이에 반해 30대와 40대 취업자 증가 비중은 2.4%에 그쳤다. 취업자 수 증가세는 16개월째 이어지고 있지만 고령층 위주로 늘어난 흐름은 지속됐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받은 세대도 고령층이었다. 더불어민주당 김한정 의원이 법원행정처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 개인파산 신청은 2만553건으로 2020년(5만280건)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이 와중에도 60대 개인파산 신청자 비중은 29.4%로 2019년(22.1%)보다 7.3%포인트 급상승했다. 철저한 준비와 노하우, 자금 여력없이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사회적 거리두기와 영업시간 제한으로 매출이 급감하면서 휴·폐업에 나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고령층에 못지않게 청년층의 취업난도 심각하다. 현대자동차가 지난 12일 전기차전용공장 신설을 계기로 10년 만에 생산·기술직 신규 채용을 발표한 것이 화제를 모았다. 그만큼 대기업이 공장에서 일하는 신입사원을 장기간 뽑지 않았다는 점이 새삼 확인된 탓이다. 대졸 취업희망자를 두고 눈높이를 낮추라고 압력을 가하기에 앞서 이들이 취업할만한 임금과 근로조건, 전망을 갖춘 일자리를 공급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몫이다. 현대차에 이어 다른 대기업도 생산직 신입사원을 채용한다는 결단이 이어질 필요가 적지 않다.

고령층의 빈곤은 선진국에 비해 사회보장제도가 뒤늦게 갖춰진 영향이 크지만 재계에 '내 임기 중에 이익을 올리면 그뿐'이라는 단기성과주의가 확산된 영향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의 능력을 1년 단위로 평가하다보니 중장기 투자는 기피하고 수익극대화에 치중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나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눈으로 본다면 이들은 진정한 최고경영자가 아니다. 돈만 된다면 어디든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나 다름없다.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고 불굴의 의지로 불가능을 극복한 이들의 기업가정신이 새삼 그립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한 고령층이나 사실상 취직을 포기할 지경에 있는 청년층을 위해 이제라도 기업가정신의 부활이 절실하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13일 사상 최초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높여 2.25%로 조정할 정도로 지금 경제위기는 자못 심각하다. 지난해 7월 0.50%에서 지난해 8월 0.75%로 금리 상승이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1년 만에 금리는 이미 3.3배 가량 폭등했다. 이정용 한국은행 총재가 당분간 0.25%포인트씩 인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힌 만큼 물가상승세의 정점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8월 하순 0.25%포인트 추가 인상은 예정된 수순이다. 시장에선 연말 기준금리를 2.75%~3.0%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빅스텝으로만 가계대출자의 이자 증가액이 6조8092억원에 달했다. 대출원리금 부담 급증에 따른 내수 위축이 몰고 올 후폭풍이 두렵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말 가계부채 총액은 1862조1000억원에 달했다. 가계부채를 가처분소득으로 나눈 백분율은 2016년 149.5%에서 지난해 171.3%로 껑충 뛰었다. 지난 3월 현재 자영업자 부채는 960조7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5월 기준으로 취약계층 여신 규모를 보면 여신전문금융회사가 74조8000억원, 저축은행이 46조원에 이른다. 취약계층이 주로 의존하는 신용카드 리볼빙 금리는 연 15~18.5% 수준이다. 앞으로 금리가 더 오르면서 이들이 어쩔수 없는 사정으로 원리금을 갚지 못할 것에 대비, 배드뱅크(Bad Bank) 설립도 검토할 때다. 

올해 물가상승률이 5~6%대에 이르고 경제성장률이 2%대 초중반에 머문다면 스태그플레이션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일시적인 외자 부족으로 발생했을 뿐 사실상 흑자도산이었던 IMF 외환위기보다 국민들의 고통이 크고 극복에 필요한 기간도 길어질 수 있다. 

최근 당면한 복합위기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고집과 미·중 기술패권 다툼, 코로나19 재확산이란 대외변수로 인해 언제 진정국면에 들어갈지 예상하기 힘들다. 국제통화기금은 지난 4월 미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3.7%로 예상했다가 지난 6월 2.9%로 낮춘뒤 12일 2.3%로 또 하향조정했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이다. 빠르면 하반기부터 일부 국가에서 경기후퇴가 나타날 것이고 내년에는 본격화될 우려가 크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당면한 난국을 극복하려면 정부와 노동자, 기업, 가계 모두 고통을 나눠져야 한다. 다만 분담의 정도에선 '가진 자'의 솔선수범이 요청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지역 봉쇄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올랐다고 해서 대기업들이 국내 상품가격에 그대로 전가한다면 서민의 삶은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독과점기업일수록 시대상황을 감안한 '적정이윤'을 파악한뒤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통해 당분간 상품값을 동결 수준으로 관리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납품단가연동제가 강제로 실시되기 이전에 하청기업의 어려움을 살펴 단가를 조정해주고 과감히 투자에 나서면서 인재도 채용하는 용단을 내릴 시점이다. 재벌그룹 오너들도 당분간 이익과 성장 지표가 아니라 브랜드의 신뢰도 제고 등 전체 국민과의 공감도 상승에 중점을 두고 최고경영자를 평가한다면 그간 업적주의가 쌓아올린 폐해를 다소나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이 종합적으로 추진하는 곳은 국민기업으로 존경 받을 수 있다.

금융권도 그간 쌓아놓은 충당금을 바탕으로 취약계층과 일단 살아남고 보자는 상생의 길에 보다 적극적으로 들어서야 한다.

정치권도 정신을 차려야한다. 당권 장악보다 더 급한 것이 민생고 해결이다. 기업이 경쟁력 있는 신상품 개발과 노동생산성 향상을 통해 수출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업법개혁을 통해 규제를 대폭 줄어주는 것은 기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노동계 지도자들과 만나 정부가 인적자본 축적을 적극 돕겠다는 의지를 밝힌뒤 미래지향적 노사관계의 비전을 제시하고 노사평화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적극 앞장섰으면 한다. 정부도 행정효율성 제고와 실질적인 규제 혁파, 시의적절한 정책 집행에 나서야 한다.

작금의 위기는 모두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무엇보다 '가진 자'의 나눔과 불굴의 도전정신이 필요한 시기다. '과연 기업가 정신은 남아 있는가', '정치권은 국민들의 고통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속시원하게 답변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했던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 되살아나야 한다. 이와 함께 표 보다는 국민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많아진다면 금상첨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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