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현건 기자
  • 입력 2022.09.01 05:3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의 잠수함 함장 명성 높아…전역 이전 마지막 계급은 소령

최일 잠수함연구소장
최일 잠수함연구소장. (사진제공=최일 소장)

명작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은 사실 잠수함 영화이다. '이 영화가 잠수함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리며 답해보고자 한다.

첫째, 마리아와 캡틴 폰 트라프는 실존 인물일까?  

그들은 실존 인물이며 실제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마리아와 폰 트라프는 실제 1927년 결혼했다. 부분적인 각색은 있었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실제로 마리아는 수녀원 출신이다. 폰 트라프가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7명이다. 또한 가족 합창단을 했으며 잘츠부르크 음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 독일군을 피해 오스트리아를 탈출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둘째, 폰 트라프는 오스트리아의 전직 해군장교로 나오는데 오스트리아에 해군이 있을까? 

물론 지금 오스트리아에는 바다가 없고, 해군도 없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2차대전 직전인 1930년대에도 오스트리아에는 해군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1918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에 막강한 해군이 있었다.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가장 큰 전함이었던 드레드노트함을 포함해서 구축함급 이상 전함만 50척이 있었고 잠수함도 6척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로부터 잠수함을 21척 추가 지원을 받기도 했다.

유럽지도. (사진=픽사베이)

셋째, 영화 속에서 첫째 딸이 남자친구에게 "우리아빠는 big naval hero"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폰 트라프는 어떤 big naval hero 였을까?

영화 속 폰 트라프는 해군에서 전역한 사회인이지만 자녀들에게 해군 복장을 입히고 보손파이프로 아이들에게 제식훈련을 시킨다. 그는 마리아와 결혼할 때에도 해군 제복을 입는다. 이미 없어진 해군인데도 해군에 대한 큰 자부심이 있어 보인다.

폰 트라프의 풀네임은 Georg Ludwig Ritter Von Trapp이다. 그는 1차대전 중 가장 유명했던 잠수함 함장 중의 한 명이었다. 폰 트라프는 1880년 4월 4일 출생해 1894년 해군에 입대했다. 1908년 잠수함에 지원했으며 1910년부터 1913년 까지 U-6 인수함장을 했다. U-6는 1910년 7월 1일 취역해 전쟁 전까지 훈련함으로 활용됐다. U-6는 미국 홀란드급 잠수함으로 미국에서 부분 건조해서 오스트리아(지금의 크로아티아) Rijeka에 있는 Whitehead company에서 건조했다.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15년 4월 17일 폰 트라프는 U-5 함장으로 취임했다. U-5는 개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유한 4척 중 한 척이었다. U-5는 U-6와 같은 유형의 잠수함이었다. 길이 32.11미터, 수상배수량 240톤, 직경 45센티 어뢰발사관 2문에 가솔린엔진을 탑재한 잠수함으로 승조원은 19명이었다. 

폰 트라프 함장은 U-5에서 9번의 출동하는 동안 잠수함 함장으로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함장 취임 9일 만에 프랑스 해군 1만2512톤 중순양함 레옹 감베타(Leon Gambetta)함을 야간에 수중에서 어뢰 2발을 발사해 2발 모두 명중시켰다. 아드리아해에서 최초로 수중 야간공격에 성공한 잠수함 공격이었다. 레옹 감베타함은 피격 10분 만에 침몰했고 빅토르 센느(Victor Baptistin Senes) 소장을 포함한 648명이 사망하고 137명만이 생존했다. 

1915년 8월 5일 U-5는 이탈리아 잠수함 네라이드(Nereide)함을 발견했다. 먼저 네라이드함이 U-5를 향해 어뢰 한발을 발사했으나 빗나갔고 U-5는 회피하는 네라이드함을 향해 침착하게 어뢰 한 발을 쏘아 명중시켰다. 네라이드함은 전 승조원과 함께 침몰했다. 이 교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희귀한 잠수함 대 잠수함 전으로 기록된다. 이어서 U-5는 1915년 8월 29일에는 그리스 1034톤 증기선 케팔로니아(Cefalonia)를 격침시키기도 했다.

국산 3000톤급 잠수함 도산안창호함. (사진제공=해군)
국산 3000톤급 잠수함 도산안창호함. (사진제공=해군)

폰 트라프는 1915년 11월 U-5 함장을 인계하고 U-14함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지휘를 맡은 U-14는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프랑스 Curie(퀴리)함이었는데, 개전 후 퀴리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모항인 풀라 항에 침투를 시도하다가 방어 그물에 걸려 격침을 당했고 승조원 일부는 사망하고 생존자는 모두 포로가 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은 이를 수중에서 인양∙개조해 U-14로 명명해서 다시 사용한 것이다. 이 잠수함은 길이 52.1미터, 수중배수량이 550톤이나 되는 당시 최신형 잠수함이었다. 폰 트라프는 U-14에서도 많은 활약을 펼쳐 수많은 전과를 세웠다.

폰 트라프는 U-5, U-14 두 척의 함장으로서 19번 출동해 13척의 연합국 선박 총 4만5669톤을 격침시키고, 상선 1척을 나포했다. 그는 그 어떤 수상함과 잠수함 함장도 이루지 못한 가장 전과가 많은 최고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함장이었다.

그는 수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U-5함장으로 프랑스 주력함 중순양함 레옹 감베타(Leon Gambetta) 격침으로 오스트리아의 최고의 훈장 기사십자장을 받았다. 영화에서도 그는 공식행사에 이것을 착용하고 있다.

넷째, 영화 속 폰 트라프는 대저택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는데 아무리 전쟁영웅이지만 퇴역 장교가 이렇게 부자로 살 수 있었을까? 

폰 트라프는 실제 큰 부자였다. 1911년 그는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첫 번째 부인이름은 아가테 화이트헤드(Agathe Whitehead)였다. 앞서 폰 트라프가 U-6를 인수할 때 그 조선소 이름이 Whitehead company라고 했는데 바로 그 회사 설립자가 아가테 화이트헤드의 할아버지였다. Whitehead는 ‘현대 어뢰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 영국인이다.

영국인 화이트헤드가 어뢰를 개발했을 때 당시 영국에서는 그 성능을 믿지 못해 사용을 거부했다. 마침 오스트리아 황제 Franz Josef가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 Rijeka에 공장까지 제공하면서 초빙함으로써 화이트헤드는 오스트리아로 오게 됐다. 화이트헤드는 어뢰 개발자였지만 다른 사업에도 관여해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됐다. 그의 손녀 사랑은 각별해서 자신의 유산을 손녀이자 폰 트라프의 아내에게 물려줬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인 김건희 여사가 28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에서 열린 '정조대왕함 진수식'에 참석해 진수선을 도끼로 끊고 있다. (사진=KTV방송 캡처)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인 김건희 여사가 28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에서 열린 '정조대왕함 진수식'에 참석해 진수선을 도끼로 끊고 있다. (사진=KTV방송 캡처)

보통 함선은 진수식을 할 때 여성이 샴페인을 터뜨린다. U-6를 진수할 때 샴페인을 터뜨린 여성이 아가테였다. 폰 트라프는 U-6의 인수함장이었기에 인연이 돼 폰 트라프와 아가테는 결혼하게 됐다. 하지만 결혼한지 11년 만에 7명의 자녀를 남기고 아가테는 열병으로 숨지고 말았다. 그녀가 떠난 후 폰 트라프와 자녀들은 영화 속 같이 대저택에서 살게 됐다.

다섯째, 우리에게 폰 트라프 대령으로 알려진 캡틴 폰 트라프는 실제 대령이었을까? 

폰 트라프가 첫 번째 결혼할 때 사진을 보면 그는 대위였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할 때는 소령이었다. 폰 트라프의 마지막 계급은 소령이었다.

폰 트라프는 영화 속에서 자신을 캡틴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주위사람들도 모두 캡틴 폰 트라프라고 부른다. 폰 트라프는 자신이 잠수함 함장이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언제, 어디서든 '함장'으로 불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캡틴은 함장이라는 의미이지 계급의 대령은 아니다. 캡틴(Captain)은 오역을 자주하는 단어이다. 육군이나 공군에서는 대위이고 해군에서는 대령으로 사용된다. 또 항공기 기장, 상선 선장, 군함 함장, 축구팀 주장 등에도 사용되는 단어이기에 경우를 잘 따져 사용하여야 한다. 따라서 캡틴 폰 트라프는 폰 트라프 대령이 아니라 폰 트라프 함장으로 부르는 게 맞다.

마지막 질문이다. 폰 트라프는 1880년 출생했다.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뒤 폰 트라프를 해군에 영입하려 한다. 이때 이미 폰 트라프 함장은 58살이다. 독일 해군은 실제 나이 많은 폰 트라프를 필요로 했을까?

영화 속에서 폰 트라프는 베를린으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는다. 베를린은 독일 해군본부가 있는 곳이다. 그의 부임지는 브레머하펜, 독일의 유명한 잠수함기지가 있는 곳이다. 독일은 폰 트라프 함장의 명성이 필요했고 그의 전투경험을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유보트 전투에 활용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상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영화내용의 사실관계를 알아보았다. 이제 독자 여러분은 왜 필자가 이 영화가 잠수함영화라고 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폰 트라프 가족은 1938년 2차 세계대전 개전 직전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가족 합창단을 꾸며 미국 전국을 순회하며 많은 음악활동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폰 트라프 패밀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폰 트라프 함장은 아내 마리아와의 나이 차이가 25살이었다. 그 사이에 또 3명의 자녀를 둬 총 10명의 자녀가 있었다. 마지막 아들이 출생했을 때 그는 만 59세였다. 폰 트라프는 67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잠수함 함장으로서 긍지를 갖고 자신과 조국을 사랑하며 살았던 폰 트라프이라는 이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영화이었다. //최일 잠수함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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