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2.09.01 12:26
8월 31일 서울지방조달청에서 '조달현장 규제혁신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제공=조달청)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창업한지 7년이 넘은 A기업은 공공조달시장에서 다수공급자 계약을 맺었다. 다른 기업들처럼 많은 주문을 따내기 위해 1회 최대납품가능량을 최대한 많이 썼다. 계약보증금으로 1회 최대납품가능량의 10%인 5억원을 냈다. 이후 1억7000만원 상당의 제품 공급을 마쳤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납품과 관련된 인증이 취소된 것이 파국을 몰고왔다. 계약이 해지되면서 5억원 상당의 계약보증금이 몰수되고 부정당 업체로 제재대상에 올랐다. 

실제 납품 금액보다도 훨씬 큰 금액의 계약보증금이 몰수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A기업처럼 계약 위반 등으로 국고로 귀속되는 보증금은 연 평균 50억원에 이른다. 전체 계약 1만9000여건 중 8000여건의 계약이 과다책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달청은 8월 31일 서울지방조달청에서 '조달혁신 규제혁신위원회'를 갖고 전체 계약업체를 대상으로 계약보증금을 낮춰주는 수정계약을 9월부터 진행하는 등 22개 과제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계약금이 10% 가량 낮아질 경우 연간 444억원의 보증금 절감이 예상된다. 아울러 단가계약 계약보증금 산정방식과 국고귀속 기준을 완화하기위한 제도 개선도 추진하기로 했다. 공공기관 납품을 위해 영혼이라도 팔 중소기업인들의 절박함을 감안해 이같은 조치에 나선 것은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입찰비용 절감을 위해 공사비 산정 내역을 공개하기로 한 조치가 주목된다. 중소건설업체들은 공공공사 입찰에 앞서 투찰 금액의 견적을 산출할 능력이 부족해 입찰대행사에 견적을 의뢰하는 실정이다. 통상 공사비의 2%를 수수료로 지급한다. 낙찰을 받더라도 이만큼 손해를 보고 공사에 들어가는 셈이다.  그간 입찰공고를 하면서 공사비 조사내역서에 공종별 재료비와 노무비, 경비 합계 등을 공개했지만 실효성은 미흡했다고 조달청은 자인했다. 

이에 따라 중소건설업체가 입찰서를 직접 작성할 수 있도록 세부공종별 ‘일위대가’(一位代價)를 추가 공개하기로 했다. 일위대가는 공종별로 단위당 소요되는 재료비, 노무비, 경비를 산출하기 위해 표준품셈에서 정한 재료할증과 노무량에 각각의 단가를 곱한 단위당 공사비를 의미한다. 10월부터 공사비 산정 상세내역에 세부공종별 일위대가를 포함해 입찰공고를 하기로 했다. 이번 조치에 따라 연간 2300여 중소건설업체의 입찰대행 비용절감효과가 예상된다고 조달청은 설명했다.

진작 이같은 조치를 했다면 입찰대행사가 중간에서 ‘통행세’를 뜯어가는 악덕 관행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조달청이 그간 복잡한 규정을 유지해온 것 역시 ‘그들만의 리그’에서 독점적 이익을 누려온 입찰대행사와 이권(利權) 관련자들을 의식했던 것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을 받을 만하다. 조달청은 향후 일위대가 추가공개로 중소건설업체가 입찰서를 직접 쓰고 있는지, 입찰대행사가 다시 개입하고 있는 지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고 미진하다면 추가적인 대책을 마련해야한다. 검은 고리가 한 번에 끊어질리 만무하다.

클라우드 등 디지털서비스 계약을 3년 고정단위로만 서비스이용료 단가계약을 체결하고 계약보증금을 보증보험증권으로 받고 있는 방식을 바꾸기로 한 것도 돋보인다. 3000억원 규모로 계약한 B중소기업은 보증규모 30억원을 감안, 보증수수료로 2300만원을 지출했다. C대기업은 2000억원 규모로 계약했지만 보증규모가 50억원으로 산정돼 6800만원을 냈다. 향후 성장성을 감안, 기업들이 뛰어들었지만 초기단계 수준인 공공시장 수요에 비해 계약기간이 3년에 달하다보니 보증수수료 부담이 컸다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 조달청은 계약기간을 1년, 2년, 3년 중 선택할 수 있도록 디지털서비스 카탈로그계약 업무처리규정과 특수조건을 바꾸었다. 조달청은 ‘갑’으로서 을’의 어려움을 경청하고 합당한 요구일 경우 필요한 조치에 나서는 적극행정이 요구된다.  

조달청이 3개 이상 기업과 단가 계약을 체결해 놓으면 공공기관은 별도의 계약 체결 없이 나라장터 쇼핑몰에서 원하는 품목을 쉽게 구매할 수 있다. 이런 다수공급자계약 기간이 당초 1년에서 통상 3년으로 장기화되면서 매년 중간점검을 통해 직접생산 등 입찰참가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지 여부를 확인하는 실정이다. 특히 혼합골재, 교통신호등, 고무매트, 토양개량제, 이동식화장실 등 16개 품명은 안전과 품질관리 강화 차원에서 최근 2개월~1년 내 시험성적서 제출이 의무화되어 있다. 납품 물량이 많다면 최대 3회 검사를 받기도 한다. 

문제는 실효성이 적은 반면 조달업체는 반복적으로 시험비용을 내야한다는 점이다. 현재 연간 164개 기업이 시험성적서를 발급받고 있다. 1회 평균 비용은 500만원에 이른다. 업체의 수익성을 떨어뜨리는 규제가 아닐 수 없다.
 
뒤늦게나마 조달청은 다수공급자계약 중간점검 시 시험성적서 제출을 전면 폐지하기로 했다. 오는 12월 입찰공고문을 변경, 시행할 방침이다. 이로 인해 내년부터 연간 시험성적서 발급비용이 8억2000만원 줄어들 전망이다.

차량임대서비스의 진입장벽 완화도 눈에 띈다. 현재 나라장터 쇼핑몰에 참여하려면 대여사업용 자동차 700대 이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전국 렌터카 업체는 2021년 말 현재 1145개에 달하는데도 5개 대기업과 2개 중견기업만 나라장터에 등록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7개사가 연간 300억원을 받고 차량을 빌려주고 있다. 조달청은 국회와 동반성장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단기는 50대 이상, 장기는 300대 이상으로 문턱을 대거 낮추었다. 9월 중 입찰공고를 수정할 방침이다. 이리 되면 중소기업 참여로 단기는 1064개사, 장기는 123개의 시장 진출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참여자가 늘어나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면 공공기관의 관련 예산이 절감될 수 있다. 중소 렌터카업체의 매출 증대는 부수효과이다.

조달청은 납품검사에서 불합격됐지만 사용에 문제가 없는 경우 할인 조건으로 공급을 허용하는 품목을 현행 섬유, 피복, 제화류 제품에서 지류, 금속울타리, PVC, PE 등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12월 감가규정을 개정, 시행할 방침이다.

조달청은 조달거래 및 진입과정에서 불합리한 비용이나 부담을 줄이고 조달거래의 지연과 비효율을 야기하는 요소를 완화하며 조달 관련 서류의 생산과 인쇄, 제출부담을 없앤다는 원칙에 따라 제1차 조달현장 규제혁신 추진과제로 22개를 확정했다. 현장에 숨어 있는 ‘그림자 규제’ 척결에 나선 것은 환영할 만하다. 이종욱 조달청장이 “이번에는 논의되지 않은 발굴과제도 올해 모두 다룰 계획”이라고 강조한 만큼 추가적인 규제혁신 조치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에 마련한 개선방안이 실제 의도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지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이 절실하다. 규제혁신의 체감도를 높이려면 사후관리와 함께 적기대응이 뒤따라야 한다. 대통령실을 의식한 '전시행정'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진제공=조달청)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