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2.10.2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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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제공=고용노동부)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조선업은 일이 힘들고 위험한데 임금을 못 올려주니 평택(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건설현장으로 가서 안 돌아오고 무안에 양파 뽑는다고 간다. 밀려난 단순노무직만 남아 있다." (하청 B사 대표) 

"조선 하청 기간제는 중상급이 시급 1만원이고 명절·휴가 때 일해도 무급이다. 하청 생산직의 절반은 세금 등을 떼고 나면 최저임금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하청 C사 노조)

"하청은 상여금이나 휴업수당이 없어 원청 임금의 70% 수준이지만 복리후생까지 포함해서 비교하면 60% 수준이다." (원청 A사 노조)

지난 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을 계기로 고질적인 원·하청 임금 이중구조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 1일 "조선업 하청 근로자들의 임금이나 노동에 대한 보상이 정당한지 검토하고 조선업을 비롯한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고용노동부가 조선업계 원하청 사용자와 노조원들과 만나 파악한 업계 현실이다.  

조선 5사로 대표되는 원청기업의 평균연봉은 만성적자의 늪에 빠진 영향으로 2016년이후 6000만원 후반 대에서 계속 정체된 상태이지만 고정상여금 등 복리후생은 유지되고 있다. 2018년과 2019년 최저임금이 빠르게 인상돼 제조업 전반의 임금이 오르면서 임금 수준은 더 떨어졌다. 최근 용접·도장 근로자의 시간당 보수가 건설업은 2만3000원~2만5000원인데 비해 조선업은 1만1000원~1만3000원으로 절반에 불과하다. 불황이 시작된 2016년이후 지금까지 조선현장에서 근로자의 3분의 2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났다. 숙련기술자가 이탈하고 단순노무직이 대거 유입되면서 기존 쌓아놓은 현장기술의 존속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외형만 보면 한국 조선산업은 순항 중이다. 지난해 선박 수주 실적은 1746만CGT로 8년 만에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 9월 현재 누적 수주비중은 42.9%로 2011년(43.3%)이후 최고 수준이다. 올해 1~9월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대형컨테이너선, 대형 LNG운반선 등 고부가가치선박 수주량은 958만CGT, 수주 비중은 67%에 달하고 LNG, LPG, 메탄올 등 친환경연료 추진 선박 수주량은 1051만CGT, 수주 비중은 58%에 이른다. 수익성이 높은 고부가·친환경선박에서 시장점유율은 세계 1위이다. 지난해 세계 선박시장 점유율에서 중국은 49%를, 한국은 33%를 차지했다. 지난 1월부터 9월까지 중국은 45%, 한국은 42%로 지난해보다 실적이 개선된 것도 고무적이다.

내용에선 딴판이다. 조선산업 근로자들은 최근 업황 회복으로 선가(船價)가 상승하면서 임금 상승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지만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88년 1월을 100으로 놓고 계산되는 선가지수는 20년 12월 125.60을 거쳐 지난 9월 현재 162.27로 09년 1월 (167.11)이후 최고 수준이다. 이래봤자 34년 만에 고작 62% 가량 오른 셈이다. 다른 공산품의 가격 상승세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더구나 실제 수익성 개선 시점은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가 시작되는 23~24년으로 예상된다. 물론 빠르면 올 하반기부터 대형 조선사의 수익구조가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긴 하다. 일단 수주하고 본다는 식의 제살깎기 경쟁으로 낮은 입찰가격에 선박을 건조해주겠다고 선주와 계약한 여파가 남아 있다.

조선업은 경기 변동에 영향을 받는 대표적인 시황·수주산업이다. 작업량이나 인력수요 변화에 대응하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30년간 하도급 활용이 늘어왔다. 이는 경쟁국도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원청(직영)→하청(사내·사외)→물량팀'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가 고착된 상태다.

원청은 도급계약서에선 하청업체의 재하도급을 금지하고 있지만 '말' 뿐이다. 원청은 경영상황이 악화되면 ▲단가 일률 삭감 ▲추가·수정공사 시수(인원과 근로일수를 곱한 수치) 불인정 ▲생산 임의 취소 및 변경 등을 통해 그 부담을 전가해왔다. 이런 갑의 횡포에 을은 그나마 물량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며 따라야 했다. 이러다 보니 생산직 중 하청 비중은 21년 69%로 90년(21%)보다 크게 상승했다. 소속외 근로자 비중도 62.3%로 모든 업종 중에서 가장 높다. 전산업 평균은 17.9% 수준이다. 이런 각자도생 구조가 이어진다면 한국 조선업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고용부는 조선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하청이 상생, 연대해 해법을 마련하고 자율 노력을 전제로 지원에 나선다는 내용의 '조선업 격차해소 및 구조개선 대책'을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내놓았다.

이번 대책은 조선업계를 살리기 위해 16년 이후 5000억원 이상의 재정을 투입했지만 구조적인 문제가 더욱 악화되면서 최근 대우조선 사태로 부각됐다는 반성에 따라 마련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해외 수주 증가와 선가 인상 등 조선업 회복의 골든 타임을 맞아 과거와는 다른 정책 접근으로 이중구조 해소의 시동을 걸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판단된다.

대책의 핵심은 '조선업 원하청 상생협력 실천협약'을 체결하고 이행하도록 유도해 자율적으로 고질적인 이중구조를 개선하고 공정거래 질서도 확립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공정거래와 이익공유, 생산성 제고를 통해 조선업의 국제경쟁력 회복과 이중구조 개선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예를 들어 원청 사용자는 ▲숙련지향형 적정 기성금 지급 ▲하청사 대형화·물량팀 축소 유도 ▲업종 단위 근로복지기금 조성 ▲원하청 통합 산업안전관리 강화 등을 약속하고, 원청 노동자는 ▲협력업체 근로자와 이익 공유 ▲직무·숙련 중심 임금체계 개편 실천을 다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청기업이 목표 이상의 실적을 올려 초과이익을 주게 된다면 하청업체 근로자에게도 일부를 배분하라는 얘기다. 만약 원청 노조가 이를 받아들이다면 ‘기득권 포기’라는 찬사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

하청 사용자는 ▲생산성 및 전문성 제고 ▲임금 체불·사회보험료 체납방지 등 경영투명성 제고 ▲물량팀 재하도급 자제 등을, 하청 노동자는 안전수칙 준수와 기술향상 노력 등 직업윤리 확립을 약속하라는 것이다.

원청은 수정공사와 추가공사 등을 적정히 반영, 합리적 수준의 기성급을 지급하고 하청은 품질로 평가 받아 공정하게 보상받는 선순환 관계가 형성된다면 공정거래 기반이 확립될 수 있다. 협력업체들이 연합과 대형화·전문화를 통해 생산과 안전관리 수준을 높이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설계와 생산을 담당하는 기업이 분리된 것처럼 장기적으로 원청은 수주·설계·엔지니어링을 맡고 하청은 생산전문으로 변신, 대응하면서 원활한 협업체제를 구축한다면 한국 조선산업의 초격차 경쟁력 확보도 가능하다. 아울러 물량팀은 사내협력사로 양성화해 사회보험 가입 등 관리를 강화하거나 협력업체에 흡수시켜 전체 인력규모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근로시간과 임금수준에서 현격하게 나타난 원하청 근로자간 격차가 완화되고 조선 노동자 전체의 처우가 개선되면 숙련인력은 조선현장을 지킬 것이고 신규 인력 유입도 이뤄질 수 있다. 이리 되면 생산성 제고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되찾아 이익구조까지 개선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선순환 국면에 들어갈 수 있다.

올해 말부터 조선업계는 1만명 내외의 생산인력이 추가로 필요한 실정이다. 당면한 인력난을 고려해 조선업 등 제조업종의 특별연장근로 연간 활용시간을 최대 180일로 한시적으로 확대하는 조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외국인력(E-9) 배정규모를 확대, 조선업에 최우선적으로 투입하고 연말까지 2500여명의 입국을 추진하다는 것 역시 대증요법일 뿐이다. 

인력난의 근본 해법은 '인력 유입→재직 유인→숙련 형성'이란 선순환고리를 마련하는데 있다. 임금 상승은 기업의 지불 능력에 좌우되지만 산업 재해 감소는 노사의 노력과 관심으로 상당부분 이뤄질 수 있다. 조선업의 용접과 도장은 자동화하기가 어려운데다 대부분 도크 야외작업으로 선박을 건조하다보니 산업재해가 자주 발생한다. 지난해 조선업 사망사고만인율(사망자수의 1만배를 상시근로자 수로 나눈 값, 근로자 1만명당 사망자수)은 0.88로 전체 사고사망만인율 0.43의 두배에 이른다. 원하청 협력으로 산업안전관리를 강화, 현장의 위험성부터 단계적으로 낮추는 것이 시급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말처럼 업황 회복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발맞춰 업종 단위로는 최초로 조선업계가 원하청 상생협력 실천협약을 체결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절실하다. 이를 바탕으로 26년까지 선원이 미승선한 가운데 원격제어로 움직이는 자율운항선박을 상용화하고 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이 전혀 없는 무탄소선박을 상용화하는데 성공한다면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하게 세계 조선 1위 국가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이번 대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주기적으로 파악해 문제점을 수정·보완해야 할 것이다. 전후방 산업간 상생 협력과 원가 구조 개선을 위해 조선 3사와 철강 3사가 반기별 협상을 통해 후판 수급량과 가격을 결정하는 기존 방식도 개선될 필요가 크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19일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기재부)
추경호(오른쪽 두 번째) 경제부총리가 19일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기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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