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2.11.21 16:55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14일 제4차 금융규제혁신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금융위)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14일 제4차 금융규제혁신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제공=금융위)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일본 보험사는 중도해지할 때 환급금을 표준형보다 30% 덜 주는 대신 그 재원으로 보험계약을 장기유지한 가입자에게 연금수령액을 높인 구조로  설계된 ‘톤틴형 연금보험’을 팔고 있다. 

톤틴연금이란 보험 가입자가 빨리 죽더라도 그간 납부한 보험료나 미리 계약한 기간만큼의 연금이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는 대신 그 돈이 살아있는 다른 가입자를 위한 재원으로 쌓이는 종신연금을 말한다. 17세기 이탈리아 은행가인 로렌조 톤티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에 따라 출자자들을 여러 조로 나눈 뒤 같은 조의 가입자가 죽을 때마다 적립된 연금이 남은 사람에게 넘겨지면서 배당이 늘어난다는 구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데다 기금 유용 등의 관리 운용 문제도 드러나 판매가 금지됐던 상품이다. 

'남의 죽음이 내겐 이득'이란 구설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보험사들은 조기사망자에게 일부 할인된 해약환금급을 주는 방식을 도입, 톤틴형이란 이름을 붙였다. 보험사에겐 부채로 인식되는 연금보험에 대한 위험관리 부담을 낮출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에 따라 일반연금보다 싼 보험료를 내세워 가입자를 유치했다.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서 사망후 재산을 남길 필요도 없는 1인 가구 등의 관심이 크다고 한다.  

현재 한국에선 이런 보험상품이 나올 수 없다. 금융당국이 보험료 납입을 완료하는 시점까지 해지환급금이 납입원금을 무조건 초과하도록 설계하도록 중도환급률을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사 입장에서 사업비를 떼고 남은 보험료로 자산운용을 하면서 이익도 내고 중도해지자자에겐 원금 이상을 반드시 지급해야하는 상황에서 가입자에 대한 연금 수준을 높이긴 힘들 것이다. 

원론적으로 저축성보험과 연금보험은 특성이 다르다. 저축성보험의 목적은 단기목적 자금 마련이고 연금보험은 노후보장을 위한 연금 재원 마련이다. 저축성보험에 대한 금융당국의 소비자 보호과제가 초기 환급률과 해지율 개선이라면 연금보험은 연금 장기간 유지와 연금액 증가이다. 그간 금융당국은 연금보험을 저축성보험의 일환으로 여기고 중도해지자 보호에 초점을 두고 규제해왔다. 이에 반해 펀드나 신탁 등 다른 업권에서 판매되는 연금상품은 중도환급률 규제를 받지 않는 실정이다. 연금보험 상품 성격에 맞지 않는 상품 규제가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보험분야 규제개선 추진 과제. (그림제공=금융위)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20일 내놓은 '보험산업 혁신·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보험분야 규제개선 방안‘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연금상품다운 연금보험이 개발되도록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자기반성이었다. 금융당국은 디지털화 등 환경변화에 대응한 보험산업의 질적 혁신과 성장을 유도한다는 목표 달성을 위한 3대 과제로 ▲산업구조 개편 지원 ▲보험회사 경영자율성 제고 ▲감독행정 및 민간 인프라 확대를 제시했다. 이제나마 더 나은 규제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선언이 제대로 실천되는지 모든 국민들이 눈을 뜨고 확인할 필요가 크다.

금융당국은 계약자가 연금보험을 깨지 않은 채 장기간 유지해 만기이후 높은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기존 상품보다 수령연금액을 높인 연금보험은 중도환급률 규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보험료를 모두 다 낸 시점 이후에도 해지환급금이 납입원금과 같거나 적은 ‘저해지형 구조’ 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소비자에게 해지환급률과 연금액을 충분히 비교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품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측면에서 뒤늦었지만 바람직한 조치로 풀이된다. 금융당국은 보험업감독규정을 개정, 내년 1분기 중 시행할 방침이다.

보험사가 보다 자유롭게 상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한다는 방침도 주목된다. 현재 보험사는 보험업법상 '특별이익 제공금지' 의무에 따라 보험사고가 발생할 위험을 낮출 수 있는 물품이나 서비스를 3만원 이내 범위에서만 소비자에게 줄 수 있다. 다만 헬스케어 서비스와 접목된 스마트워치 등 건강증진형 상품은 현재도 20만원 한도 내에서 제공이 가능하다. 

보험 가입을 유인하기 위해 일정 금액 이상의 가치 제공을 금지하는 것은 외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전관리형 물품·서비스의 경우 예외를 인정한다. 미국 보험사 히포(Hippo)는 보험 가입자에게 연기·누수 ·침입 등을 감지할 수 있는 스마트홈 센서를 제공한다. 벨기에 보험사인 AG 인슈어런스는 화재보험상품 가입자에게 주택 보수와 24시간 긴급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프랑스 보험사인 악사는 자사 앱을 특정 커넥티드 기기와 연결해 침입이나 화재 등 예방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전자기기회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계약자가 기기를 살 때 할인혜택을 제공한다. 

이런 사례를 감안, 금융당국은 보험사고 발생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통계적으로 검증돼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엔 20만원 이내 물품·서비스 제공을 허용하기로 했다. 지나친 판촉경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집중 모니터링을 실시할 필요성도 적지 않다.

보험사의 자산운용 규제를 개선하기 위해 보험업법과 시행령을 개정한다는 방안도 업계에서 반길 만하다. 내년부터 보험부채에 대한 시가평가가 도입되는 것을 감안, 금리 위험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파생상품 거래한도 규제(현재 총자산의 6%)를 폐지한다는 것은 당연한 조치다. 채권을 차환발행할 때 상환예정 물량은 자기자본의 100%로 규정된 채권발행한도에서 제외, 일시적인 한도 초과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숨통을 열어준다는 것도 논리적이다. 보험사가 보유 중인 유동성 자산의 범위에 ‘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자산’을 추가한다는 것도 은행과 형평성을 맞춘 조치로 풀이된다.

이번 보험분야 규제개선 방안이 나오면서 실효성 없는 금지규정이 적지 않았음이 새삼 드러났다. 보험업법은 허위·부실·지연 손해사정이나 특정 병원 소개 후 대가 수수 등 손해사정사의 불공정행위를 금지했지만 정작 이를 어긴 사람이나 법인에 대한 과태료 부과 등 제재규정을 갖추지 못했다. 보험사 자회사가 승인없이 업종을 추가하거나 변경한 것이 적발돼도 제재할 수 있는 규정이 없었다. 이런 문제를 방치했던 금융당국은 이제서야 손해사정사의 금지 행위 위반에 1000만원의 과태로 규정을 신설하고 보험회사 자회사의 위법 행위엔 5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보험업법을 고치기로 했다. 직무유기나 다름없는 금융당국의 그간 행태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보험협회가 처리 가능한 민원 유형. (표제공=금융위)

민원서비스가 소비자에게 신속히 제공되도록 보험협회의 역할을 확대한다는 금융당국의 결정은 바람직하다. 2020년 전체 금융민원 중에서 보험 분야가 59%를 차지했다. 금융감독원의 제한된 인력으로 처리기간은 17년 평균 16.5일에서 20년엔 29일로 대폭 늘어나면서 민원인의 불만도 커졌다. 이를 감안해 업무처리의 단순실수나 직원 불친절, 보험계약 및 보험료 관련 정보 문의 등 단순민원은 보험협회가 처리할 수 있도록 보험업법과 시행령을 개정하기로 했다. 물론 상품설명 불충분이나 손해액 및 보험금 산정, 보험급 지급 지연 등 보험사와 소비자 간에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분쟁민원은 현재처럼 금감원이 맡는다.

합리적인 해결책이지만 협회가 회비를 내는 회원사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도록 민원처리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제대로 확보하느냐가 중요하다. 금융당국이 예시한 것처럼 외부 전문가를 포함한 민원심의위원회를 구성, 가동하고 민원센터를 독립적으로 운영해 업계의 간섭을 차단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할 것이다.

날로 늘어나는 보험사기를 제대로 적발하기 위해 보험협회가 보험사기 대응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도 옳다. 협회가 보험사기 신고자에 대해 포상금을 주고 보험사기 예방과 홍보에 적극 나서야만 보험범죄로 인한 보험계약자와 보험사의 손해를 줄일 수 있다.

한국 보험산업 규모 (그림제공=금융위) 

보험산업 시장은 2018년 202조원에서 21년 225조원으로 연평균 3.6% 성장하고 있으며 실손보험가입자는 3900만명에 달한다. 낡고 촘촘한 규제 탓에 2020년 현재 온라인 보험가입 비중은 생보 0.3%, 손보 6.3%에 불과하다. 다른 산업분야에서 디지털 전환이 상당부분 이뤄진 것과 비교하면 보험업계는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이다. 혁신적 상품과 서비스를 통한 질적 경쟁 없이 유사한 상품을 보험설계사를 통해 파는 마케팅 경쟁만 이뤄지면서 산업 전반의 역동성을 잃었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고여 있는 보험시장이 활기를 되찾으려면 새로운 서비스 수요에 발맞춘 혁신 상품이 많이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 상품별 특화 보험회사 신설을 적극 유도한다는 금융당국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 중요하다. 지속적인 규제 혁파를 통해 향후 국제보험그룹(IAIG)의 글로벌 보험회사 기준을 충족하는 국내 보험회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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