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2.12.13 17:42
이정식(왼쪽) 고용노동부장관이 지난 7일  경기도 푸르메소셜팜에서 표고버섯을 키우는 발달장애 청년 근로자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이정식 장관 페이스북 캡처)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국가공기업으로 출발했다가 민간 대기업으로 변신한 A사는 임금 수준이 월등한데다 고용안정성도 매우 높은 '꿈의 직장'이다. 임원으로 승진하면 장차 최고경영자가 될 꿈을 꿀 수 있지만 대체로 몇 년 내 물러나게 된다. '별'을 달지 못한 대부분의 직원은 후배뻘 임원의 눈치를 받긴 해도 성과를 유지하면 만 60세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다. 상당수 기업들이 빠르면 만 55세부터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첫해 삭감폭도 20~30%에 이른 곳도 있는데 비해 A사는 만 59세부터 적용하고 삭감률도 10%에 불과하다. 정규직 직원들의 이같은 혜택은 공기업 시절 맺어진 임금 및 단체협약의 기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A사처럼 특정 산업영역에서 독과점적 서비스를 제공하며 지속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는 대기업들은 임금체계에서 몇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해가 지나면 자동으로 임금이 올라가는 호봉제를 채택하고 있고 노동조합이 있으며 생산성이 낮은 업무는 외부에 도급 또는 위탁을 준다는 것이다. 입사한지 오래된 정규직 직원들이 받는 임금의 일부는 을(乙)의 관계에 있는 협력사에 대한 연례적인 납품 단가 인하를 통해 하청사 직원에게 전가되고 가격 인상 과정에서 소비자도 분담한다. 노동조합의 강력한 보호 아래 초과수익을 챙기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갑(甲)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직원이 많은 회사일수록 호봉제를 채택한다. 근로자 1000명 이상 기업의 70.3%가 호봉제를 운영하는데 비해 300인 이상은 60.1%, 100인 이상은 55.5%에 그친다. 100인 미만 기업의 62%는 임금체계가 없어 사업주가 자의적으로 결정한다. 직원 대다수는 최저임금을 받는다. 2021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 임금은 56.3%, 남성 대비 여성 임금은 69.6%,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은 72.4% 수준이다. 2019년 현재 노조조직률은 12.5%이다. 근로자의 87.5%는 노조가 없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이처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양극화, 분단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점점 더 구조화되면서 인적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이 난관에 봉착한 상태다. 과거 10%를 웃돌던 경제성장률이 2%대로 주저앉으면서 대기업과 금융기업, 공공부문에 정규직으로 들어가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저임금과 불규칙한 노동시간에 허덕이는 소기업 직장인들은 한탄과 자책의 눈물을 흘리는 실정이다.

이제라도 근로자간 격차를 늘리는 것은 물론 재생산을 촉진하는 원인을 찾아내 개선대책을 마련하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대한민국이 역동성과 국가경쟁력을 되찾지 못한다면 후손들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고용노동부가 지난 6월 내놓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에 따라 지난 7월 전문가 논의기구로 발족한  미래노동시장 연구회는 5개월간에 걸친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12일 ‘공정한 노동시장, 자유롭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려는 노동개혁의 청사진을 담은 권고문을 내놓았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출근해서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전통적인 공장형 노동을 토대로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과 1997년 제정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의 독소조항을 개선하자는 과제를 폭넓게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근로시간 단축과 노동의 질 개선을 위해 연장근로단위를 ‘주·월·분기·반기·연’ 단위로 개편하면서 연장근로 총량을 ▲월 52시간 ▲분기 140시간 ▲반기 250시간 ▲연 440시간으로 줄이고 근로일간 11시간 연속휴식 등 보호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연구개발 외 1개월로 제한된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을 전 업종에 걸쳐 3개월로 확대하고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도입, 휴가 사용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점도 눈에 띈다. 임금격차 해소와 공정성 회복을 위해 중소기업·근로자에 대한 임금체계 구축을 지원하고 업종별 사회적대화 모델 확산, 업종 단위 임금 체계 구축을 통해 업종별 임금체계 개편을 지원하며 직무·성과평가 컨설팅 확대, 직무평가 도구 개발 등 공정한 평가와 보상 확산을 지원한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연구회는 "연공형(年功形) 임금체계는 다수에게 불공정하다. 이는 연공의 안정적 누적이 가능한 계층에게 배타적으로 유리하다"며 "유노조 대기업 사업장에 종사하는 정규직 남성은 연공 축적이 가능한 유일한 계층인데 비해 비정규직, 중소기업, 여성 등의 경우 내부노동시장에 올라탈 수 없다"고 비판했다. 개인의 직무와 능력이 연계되지 않는 연공급을 운영하는 회사일수록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기업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공정한 임금체계가 도입되는 것은 마땅하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이란 가치도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

연구회 권고문이 발표된 12일 이정식 고용노동부장관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40여년을 노동과 살아오면서 가슴 속에 품었던 '상생을 위한 연대'의 길을 찾아왔다”며 “전문가들의 진단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이 모든 부당과 불공정, 불법의 관행을 털어내고 조직화되지 못한 약자까지도 보듬는 상생을 위한 연대의 얼굴로 바뀔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노동시장 개혁을 기필코 완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노동운동에 장기간 종사해온 전문가로서 임금과 근로시간 관련 제도개선안을 빠른 시일 내 입법안을 마련하겠다는 다짐에 거는 기대가 크다.

기업의 투자는 보다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 높고 노사관계가 안정되고 임금도 경쟁력을 갖춘 국가에 집중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문재인 정부 시절 법인세율이 22%에서 25%로 높아지면서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가 급증하고 외국 기업의 국내 투자는 감소했다는 수치가 이를 반증한다.

노동계는 1987년 이후 장기간 머물러 있는 전투적 노사관계에서 속히 벗어나는 것은 물론 디지털 기술혁신과 산업구조의 대변화 추세에 발맞춰 변화해야 한다. 사용자 역시 지속가능한 노사관계 형성에 주력하면서 임금체불이나 부당노동행위가 근절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간 노동개혁이 여러 차례 시도 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미래시장노동 연구회가 밝힌 것처럼 개혁의 필요에 대한 공감과 쟁점에 대한 연대의 모색이 부족했던 데다가 기득권 유지와 개혁 비용 배분을 둘러싼 담합과 갈등 때문이었다. 실질적 개혁이 이뤄지지 못하는 사이에 시장환경의 변화로 법·제도간 간극이 더 벌어져 사법적 갈등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시장 개혁이 지연될수록 국민 모두의 피해와 비용만 늘어날 뿐이다.

의사, 약사, 변호사, 변리사, 공인회계사 등 전문자격증이 없는 대부분의 청년들에게 평생직장은 사라졌다. 일생동안 여러 개의 일자리를 가지면서 생계를 꾸려가야 한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 카오스크와 인터넷을 통한 상품 주문 확산으로 노동력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 감축도 불가피하다. 공장시대에 마련된 노동법제가 하루속히 현대화되어야만 소모적인 분쟁과 연령 집단간 대결구도가 사라질 수 있다. 첫 출발점은 임금체계 개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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