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2.12.27 14:41
(인포그래픽=고용노동부 페이스북 캡처)
(인포그래픽=고용노동부 페이스북 캡처)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1997년 3월 제정된뒤 여러 차례 개정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노조에 대해 회계감사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노조 대표자는 그 회계감사원으로 하여금 6월에 1회 이상 당해 노조의 모든 재원 및 용도, 주요한 기부자의 성명, 현재의 경리 상황 등에 대한 회계감사를 실시하고 그 내용과 감사결과를 전체 조합원에게 공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노조 대표자는 회계연도마다 결산결과와 운영상황을 공표하여야 하며 조합원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열람하게 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가 아닌 '하여야 한다'로 표현된 것처럼 강행조문인데도 위반자에 대한 과태료 처분 규정은 없다. 노조의 자율성과 자주성을 존중한다는 차원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럴 바에야 이런 조문을 아예 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엉성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법조문이 결과적으로 건설노조의 조합비 횡령을 조장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고용노동부의 직무유기이다. 법에서 회계감사원에 의한 회계감사 실시 의무를 규정했는데도 정작 시행령에는  자격기준 등에 관한 규정이 전무하다. 고용부가 이리 허술하게 해놓으니 노조위원장의 상당수가 회계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한 자신의 측근이나 선거운동 공신 등을 지명하면서 회계감사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과태료 규정 유무 자체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고용부의 관리감독 방기로 과태료 규정조차 사문화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노동법은 노조가 조합원 명부, 규약, 임원의 성명과 주소록, 회의록,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를 작성하여 주된 사무소에 비치하여야 하며 회의록과 재정장부·서류는 3년간 보존하여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아울러 노조는 행정관청이 요구하는 경우 결산결과와 운영상황을 보고하여야 한다. 이런 조문에도 불구, 고용노동부는 서류 비치 확인, 재정 상황 보고 요구 등 필요한 책무를 그간 수행하지 않았다. 그 핑계로 '노조 자치'를 내세웠다. 

고용부가 본연의 책무를 다하지 않다보니 일부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재정상황을 적극적으로 공개하지 않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조합원도 노조의 돈 씀씀이에 별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원죄는 과거 대형 노사분규 발생 저지에만 관심을 두었던 고용부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노총 출신의 노동전문가인 이정식 고용부 장관이 6일 노동조합의 재정투명성 관련 브리핑을 통해 조합원 1000명 이상 단위노조 210곳을 비롯해 한국노총, 민주노총, 미가맹 상급단체 등 총 253곳을 대상으로 내년 1월말까지 서류 비치 및 보존의무에 대해 자율점검에 나서도록 오는 29일 공문을 발송한다고 발표한 것은 뒤늦게나마 제 할 일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풀이된다. 노조의 불투명한 재정운영 관행을 이제라도 타파하기 위해 조합원에게 재정운용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도록 한다는 방침은 입법 취지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고용부는 '자율점검결과서'를 보고하지 않거나 확인 결과 일부 서류가 누락된 노조에게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방침이다. 

(인포그래픽=고용노동부 페이스북 캡처)
(인포그래픽=고용노동부 페이스북 캡처)

노동조합법의 허점도 보완한다는 결정 역시 주목된다. 회계감사원을 통한 회계감사를 의무화하면서도 자격을 제한하지 않았던 점을 보완, 회계감사원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자격과 선출 방법을 구체화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결산결과 및 운영상황 공표와 관련해 시행령에서도 구체적 사항을 규정하지 않았던 잘못도 시정, 재정 상황 공표의 방법과 시기를 명시한다는 조치도 조합원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일정 규모 이상 노동조합의 회계감사 결과를 내부조합원 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알 수 있도록 공표를 검토하고 조합원의 열람권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확대한다는 방향도 눈에 띈다. 노조 재정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도록 관련 법을 개정하는 것은 ‘깜깜이 회계'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노조 재정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줄일 수 있는 처방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대형 노조, 공공 노조부터 그간의 불합리한 관행과 전근대적인 의식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요구된다.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차원에서 정부와 국회의 법률 개정 작업에 앞서 재정운영 결과를 자발적으로 홈페이지에 낱낱이 공개했으면 한다. 

(인포그래픽=고용노동부 페이스북 캡처)
(인포그래픽=고용노동부 페이스북 캡처)

정부가 보다 관심을 쏟을 대상은 저임금노동자와 청년이다. 이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임금체불, 불공정 채용, 직장 내 괴롭힘, 포괄임금 오·남용, 부당노동행위 등 5대 불법·부조리를 근절하기 위한 근로감독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은 당연하다.   

지난해 30명 미만 사업장에 다니는 임금근로자는 1197만8000명으로 조사됐다. 노동조합 가입이 가능한 전체 임금근로자 2087만100명의 57.4%에 달할 정도로 많지만 조합원 수는 2만5170명에 그쳤다. 전제 조합원을 조직 대상 노동자로 나눈 백분율인 노조 조직률은 0.2%에 불과했다. 30~99명 사업장의 조직률도 1.6%로 별반 다르지 않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이야말로 사회적 약자이다.

100~299명 사업장이 되어서야 조직률은 10.4%로 두 자릿수로 올라가고 300명 이상 사업장은 46.3%에 달한다. 공무원 부문 조직률이 75.3%, 공공 부문의 경우 70%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대한민국 노조는 대규모 사업장 노동자와 공공부문 종사자들을 대표하고 있다. 정작 보호가 절실한 소규모 영세 기업 근로자들은 노조 결성을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음을 반증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내년 국정개혁 과제 중에서 노동개혁을 최우선하겠다는 윤 대통령은 노조 조직률 수치와 노조 재정 투명성 제고 방안을 보고받고 "국내 노조가 노동 약자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노노간 착취구조 타파가 시급하다. 정부는 노동 약자 보호에 정책적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인 '다트'처럼 노동조합 회계공시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공정과 상식을 원칙으로 합리적 노사관계를 하루속히 정립하고 폭력과 협박으로 다른 노조의 조합활동을 방해하거나 채용을 미끼 삼아 돈을 받아 챙기는 등 불합리한 관행부터 추방해야만 국가경쟁력이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의 지시는 의미가 작지 않다.

노사관계에서 노조의 자율성 존중은 중요하다. 다만 자율은 결코 방종이 아니다. 노조는 제 역할에 걸맞은 책임을 다할 때 존중받을 수 있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도 확보할 수 있다. 이제라도 노조는 노동시장 격차 완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과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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