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02.07 17:10
(표제공=기획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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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웍스=최승욱 기자] #1.외국인 투자자 A씨는 내일 한국 주식에 투자하려고 한다. 한국 시간으로 밤 10시30분 나오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 결과를 보고 바로 원화로 환전할 계획이다. 이미 한국 외환시장은 오후 3시30분에 마감된 상태. 부득이 국제금융중심지인 런던, 싱가폴, 뉴욕 등에 있는 역외 외환시장에서 차액결제선물환(Non-Deliverable Forward) 거래를 통해 원화 매입 환율을 미리 확정한다. 한국 주식을 매수하려면 원화 현물이 필요하기에 내일 한국 외환시장이 오전 9시 문을 열자마자 현물환 거래를 추가로 해야 한다. 평소 선진국에 투자할 때 런던에 있는 글로벌 은행과 거래하고 있지만 원화 매매는 한국에 있는 금융기관을 통해야 한다. 이래저래 번거롭다.  

#2. 한국인 B씨는 미국 주식에 관심이 크다. 미국 증시가 열리는 시간은 한국에선 밤이다. 이미 국내 외환시장이 마감돼 시장 환율보다 높은 가(假)환율로 달러를 환전해야 한다. 불리한 환율로 달러를 사는 바람에 작정했던 수량만큼 사지 못해 화가 난다. 다음 날 우리 외환시장이 개장되면 실제 시장 환율로 정산되면서 입금된 차액을 다시 은행계좌에 송금해야 한다. 

한국 외환시장은 오전 9시에 열려 오후 3시30분에 거래를 마친다. 한국거래소가 운영하는 증권시장도 마찬가지다. 해외 주식투자자들은 증시가 마감된 후 환전 규모가 확정된다. 은행은 외환시장이 끝난 뒤에는 고객으로부터 사들인 달러를 은행간 시장에서 다른 은행에 파는 것이 어려워 해외투자자에게 더 높은 수수료를 요구한다. 외국인 투자자는 불리한 환율로 원화를 달러화로 바꿔야 한다. 짜증이 날 법하다.

한국의 무역규모는 2022년 1조4150억달러로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의 2808억달러,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의 8573억달러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하루 평균 주식거래량도 1997년의 6억달러에서 2008년 59억5000만달러를 거쳐 2022년에는 124억5000만달러로 급증했다. 무역순위가 지난해 처음으로 세계 6위로 올라설 정도로 무역대국이 되었지만 외환시장은 성장이 정체된 상태다. 은행간 시장에서 하루 평균 원·달러 현물환 거래량은 2022년 90억4000만달러를 기록했다. 1997년의 18억3000만달러, 2008년의 78억1000만달러와 비교하면 거북이 걸음을 면치 못하는 신세다.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한 트라우마로 외국 금융기관의 국내 외환시장 접근을 막아온 부작용으로 한국 원화는 글로벌 시장에서 ‘위험통화’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는 정부가 환투기 방지를 위해 비거주자간 원화의 지급과 수취 사유를 수출입 등 경상거래로 제한한 영향이 크다. 

외국환거래법령이 외국 금융기관간 역외 외환시장에서 원화거래를 막자 계약과 만기 시점간 차액만을 달러화로 결제하는 역외 원화 NDF 시장 규모는 2013년 196억달러를 기록, 같은 해 194억달러에 그친 현물환 시장을 추월했다. 하루 평균 은행간 거래와 대고객 거래를 포함한 현물환 시장 규모가 2022년 351억달러로 전세계 16위에 그친 반면 NDF 시장은 498억달러로 전세계 1위에 올라서 있다. NDF는 일반적인 원달러 선물환거래와 달리 원화 결제가 필요없고 24시간 자유롭게 거래되며 레버리지도 높다. 국제 외환시장이 불안해지면 원화 폭락을 목표로 하는 투기적 거래가 기승을 부려왔다.

기획재정부는 원화 접근성 부족이 원화표시 자산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렸다고 판단하고 있다. 외국인은 2019년 국내주식을 1조6000억원어치 순매수한 것을 끝으로 순매도 기조로 돌아섰다. 순매도 규모는 2020년 24조3000억원, 2021년 24조9000억원으로 늘어났고 2022년에는 11조1000억원으로 다소 줄었지만 ‘셀 코리아’ 흐름에서 큰 변화가 없다. 이에 반해 내국인의 해외주식 순매수는 2019년 25억1000만달러에서 2021년에는 218억6000만달러로 급증했고 2022년에도 118억9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국내 증시에선 외화가 매년 새어나가고 국내 투자자금마저 달러화 등으로 변신, 외국으로 뼈져나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금이 움직이는 길이 금융이라면 외환은 나라 안팎의 자본이 왕래하는 길이라고 할 만하다. 글로벌 통상국가로 우뚝 선 한국에 있어 외환시장의 선진화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과제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7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서울외환시장 운영협회의 세미나에서 ‘글로벌 수준의 시장접근성 제고를 위한 외환시장 구조개선방안’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성욱 기재부 국제경제관리관은 이날 개회사를 통해 "정부는 나라밖과 연결되는 수십년된 낡은 2차선의 비포장도로를 4차선의 매끄러운 포장도로로 확장하고 정비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그림제공=기획재정부)
(그림제공=기획재정부)

개선방안의 골자는 국내 외환시장을 해외 금융기관에 전면 개방, 외국 금융사가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유럽과 미국의 개장시간에 맞춰 국내 외환시장의 개장시간을 1차적으로 새벽 2시까지로 연장하고, 단계적으로 늘려 향후 24시간 운영한다는 것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에서 벗어나고 '글로벌 금융허브'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분석된다.

이번 방안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6년 만에 국내 외환시장을 개방적이고 경쟁적인 시장구조로 전환시킨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글로벌 수준으로 접근성을 높여 국제경쟁력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다만 대외안전성을 고려, 한국 외환당국의 규제와 감독체계에서 벗어나는 역외 원화시장은 개설하지 않는다는 기존 원칙은 고수한다. 

정부는 올해 외국환거래법을 개정하고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업계 등이 참여하는 '외환시장구조 개선 추진작업반'을 구성, 운영한다. 2분기 중 해외투자를 대상으로 범부처 합동 로드쇼를 갖기로 했다. 2024년초 시범운영에 들어간뒤 2024년 7월부터 시행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번 개선방안이 성공적으로 추진된다면 이미 발표한 증시 선진화 작업과 함께 숙원과제인 한국 증시의 MSCI 선진국지수 편입 가능성이 대폭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빠르면 오는 5월말 발표를 거쳐 6월 선진국지수 관찰대상국에 등재된뒤 2024년이나 2025년 선진국지수에 공식 편입될 수 있다. 

(표제공=한국은행)
(표제공=한국은행)

개선방안의 핵심은 국내 외환시장의 대외 개방 차원에서 일정 요건을 갖춰 정부의 인가를 받은 해외 금융기관(RFI·Registered Foreign Institution)에 대해 국내 은행 간 시장에 직접 참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해외에 있는 외국 은행이 국내 외환시장에서 거래하려면 '외은지점'(외국은행 국내지점)을 설립하거나 국내 금융기관의 고객이어야 한다. RFI가 국내 외환시장에서 정상적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현물환은 물론 단기 외화자금거래인 FX 스왑 거래도 허용한다. FX 스왑이란 현재 현물환율로 여유통화를 담보로 해서 필요통화를 빌리고 만기가 오면 계약 당시 선물환율로 원금을 재교환하는 1년 이하 만기의 단기 외화자금거래를 말한다. 글로벌 투자기관은 국내 투자시 현물환 이외에 환헤지를 위한 FX스왑거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한 조치다.

건전한 거래질서 유지를 위해 RFI는 현재 은행 간 시장 참여가 가능한 국내 금융기관과 동일 유형의 글로벌 은행·증권사 등으로 국한된다. 외환전문투자회사 등 단순 투기 목적 금융기관은 국내 외환시장에 들어올 수 없다. RFI가 은행 간 거래 시 국내 외국환중개회사를 경유하도록 의무화해 외환당국의 거래 모니터링과 시장관리 기능은 현재와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한다. 한국에 지점이 없는 RFI는 산업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JPM, Credit-Agricole 등 '선도은행'에 한국 외환당국에 대한 신고와 보고 등 업무를 맡길 수 있고 원화를 빌릴 때에도 신고의무가 면제된다는 점도 눈에 띈다.

국내외 시장 참여자들이 시간 제한을 받지 않도록 국내 외환시장의 개장시간을 영국 런던금융시장의 마감시간인 한국 새벽 2시까지 연장한다. 향후 은행권 준비 상황과 시장 여건 등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뉴욕시장까지 확대, 시장을 24시간 운영할 계획이다. 이리되면 해외투자자들이 제기해온 불편사항의 대부분이 해결되는 셈이다.

실시간 전자거래 고도화를 위해 고객을 대상으로 한 외국환 전자중개업무(애그리게이터·Aggregator)를 허용한다는 것도 주목된다. 애그리게이터는 은행이 아닌 기관이 은행들과 고객 간의 외환거래를 전자적으로 중개하는 업무를 의미한다. 글로벌시장에선 이미 보편화된 플랫폼으로 ▲당사자간 메신저로 가격을 확인하고 주문을 거쳐 거래 체결 ▲고객 호가 요청에 은행별로 호가를 제시하면 고객이 최적 가격을 내놓은 은행을 선택해 거래 체결 ▲은행이 고객에 지속적으로 호가를 제시하면 고객은 은행별 호가를 확인한뒤 최적 가격의 은행과 거래 체결 등의 형태로 이뤄진다. 은행이 고객에게 지속적으로 호가를 제시하고 고객은 은행별 호가 확인없이 최적 가격에 자동으로 거래가 체결되는 'Non-Disclosed Streaming'은 허용되지 않는다.

달러, 유로,엔 등 선진통화는 역외에서 24시간 자유롭게 거래되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국적이나 법률적 지위와 관계없이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여전히 역외거래가 불허되는 원화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준기축통화도 아닌 원화를 역외 환투기세력에게 무방비 상태로 던져줄 수도 없다. 시장 참가자들의 매수·매도 가격제시와 호가의 실시간 제공, 주문의 접수와 매칭, 체결 등 모든 과정이 전자적 플랫폼을 통해 자동으로 실행되고 완결되는 전자거래 방식을 100% 활용한다는 금융당국의 결정은 당분간 역외 원화시장을 개설할 수 없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 불가피하다.

이번 제도 개선으로 내년 하반기부터 외국인의 원화 거래 불편이 대폭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리 되면 원화자산에 대한 투자가 늘어날 수 있다. 국내외 금융기관간 플랫폼과 가격 경쟁이 과거보다 치열해지면서 외환거래 서비스 질 향상도 예상된다. 거래 규모가 늘어나고 거래 동기도 다양화되면서 시장안정 효과도 나타날 수 있다.

이를 통해 원화의 국제적 통용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기대효과이다. 중장기적으로 무역결제와 자본조달과정에서 외화의존도를 낮추고 환리스크도 줄여갈 수 있다. 원화의 국제화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다만 RFI의 신규 참여가 외환시장 불안요인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거시건전성 제도와 비상계획을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외환당국은 현행 선물환포지션 비율규제에 이어 국내 금융기관의 RFI를 상대방으로 하는 대(對)RFI 선물환포지션 비율을 별도로 산정, 관리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다. 외국환 거래법령에 유사시 RFI 자본거래에 대한 직접통제수단을 구체화할 방침이다. 외국 감독당국과의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RFI의 의무 위반내용을 알리고 직접 또는 위탁감사를 실시한다는 감독강화 방안도 추진할 방침이다. 

각 분야에서 대외개방을 통해 국부를 키워온 대한민국이다. 국내 금융기관이 외환시장 구조 개선 과정에서 원화거래의 중심적 역할을 맡으면서 수익을 추가 창출해 국제경쟁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도록 금융당국의 세심한 관리감독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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