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02.27 16:01
조선 5사 원·하청 대표 각 5명과 이정식(앞줄 왼쪽 네 번째)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27일 현대중공업에서 조선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 협약서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HD현대) 
조선 5사 원·하청 대표 각 5명과 이정식(앞줄 왼쪽 네 번째)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27일 현대중공업에서 조선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 협약서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HD현대)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조선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선주로부터 선박 주문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수주 물량과 공정 상황에 따라 인력수요 변동도 큰 산업이다. 이런 특성으로 국내 조선업은 원청, 하청, 물량팀으로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고착화됐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 원청 5사는 2016년부터 심각한 불황을 겪으면서 평균 직원 연봉이 6000만원 후반 대에 정체된 상태다. 하청기업은  더 열악하다. 임금은 원청의 70% 수준이지만 원청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복리후생을 감안하면 60% 수준으로 떨어진다. 저임금과 고위험, 불안정한 일자리라는 약점으로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친환경·고부가가치 선박을 중심으로 수주가 늘고 있지만 현장에서 일할 근로자는 턱없이 부족하다. 빠져 나간 숙련기술자들은 복귀를 꺼리고 있고 취업난에 처한 청년들에게 조선소는 관심 밖이다. 정부는 국가기간산업인 조선업 회생을 위해 2016년이후 5000억원 이상의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붓기'로 끝났다. 원하청 임금 이중구조가 더욱 심화되면서 하청근로자들의 쌓인 불만은 지난해 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의 파업으로 폭발한 바 있다. 

이같은 취약성을 해소하기 위해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0월 17일 향후 이익 공유와 생산성 제고 노력을 담은 '조선업 원하청 상생협력 실천협약' 체결을 통해 조선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이중구조도 개선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삼은 '조선업 격차 해소 및 구조개선 대책'을 내놓았다. 이어 11월 9일에는 조선 5사 원·하청, 전문가,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 정부, 지자체 관계자 등 24명으로 '조선업 상생협의체'가 출범했다. 상생협의체는 원청사, 사내협력사, 하청 노조, 지자체 등을 19회 찾아가고 6회에 걸친 실무논의를 거쳐 최근 '조선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 협약'을 마련하는데 합의했다. 원청은 적정 기성금을 지급하고 하청은 임금인상률을 높여 원하청 보상 수준 격차를 줄이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번 협약은 법률적 강제나 재정투입만으로는 이중구조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전문가가 내놓은 대안을 놓고 이해당사자 간에 공감과 지지, 설득과 조율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특징을 갖는다. 원하청이 자발적인 협력을 기반으로 공정과 연대의 실천을 통해 상생협력에 나서고 인력의 유입·육성·유지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원하청사가 마련한 해법에 대해 정부와 지자체는 이행과 실천을 돕는다는 패러다임이 산업현장에서 구현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표제공=고용노동부)
(표제공=고용노동부)

27일 오전 현대중공업 영빈관에서 조선 5사 원·하청 대표 각 5명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김두겸 울산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5사는 협력업체의 생산성 향상 노력에 상응하여 인건비와 시수 등 기성금에 반영하고 협력업체는 원청의 기성금 인상에 상승해 협력업체 종사자들의 임금 인상률을 높인다"는 취지의 상생 협약에 서명했다. 원청사가 조선업 업황이 개선되는 향후 5년간 ▲임금인상률 ▲기성금 단가 인상률 ▲사내 복지 등에 있어 원하청 간 보상수준의 격차를 최소화하고 원청과 하청의 임금 격차 최소 기준 등의 목표를 설정하며 임금 격차도 축소하겠다고 다짐한 것이 주목된다.

협약에는 협력업체가 실제 근로자의 임금을 높였는지를 상생협의체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원하청 임금 격차 축소를 위해 실태조사도 추진한다는 단서조항이 들어 있어 실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동일노동에는 동일임금을 지급한다는 기본 원리가 지켜지는 기반이 상당부분 마련된 셈이다.  

조선업계가 일의 가치만큼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는 '공정임금'을 실현하고 임금 수준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임금체계를 개편, 구축하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한 것도 눈에 띈다. 용접 등 특정 공정에 업무 난이도와 숙련도를 반영한 임금체계를 시범 실시하고 정부는 컨설팅 지원 등을 통해 이를 체계적으로 뒷받침하며 임금체계 개편기업에 대한 지원방안도 검토한다는 것이다.

조선 5사가 협력업체 종사자에 대한 임금 체불 등을 예방하기 위해 '에스크로' 결제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도 돋보인다. 에스크로는 은행 등 제3자의 감시 아래 묶여진 계좌를 뜻한다. 원청이 하청에 기성금을 지급할 때 인건비 항목을 에스크로 계좌에 이체하고 하청이 종사자를 대상으로 임금을 줄 때 원청의 확인을 거치게 된다. 이에 따라 체임이력이 있는 협력업체에게는 에스크로 시스템을 의무적으로 도입한다는 조치는 당연하다. 다른 업체도 단계적으로, 전사적으로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조선 5사와 협력업체는 상시적인 업무에 재하도급 사용을 최소화하는 것에도 합의했다. 이를 위해 단계적으로 재하도급을 프로젝트 협력사 등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한다. 최소 5년 간 진행상황을 모니터링할 예정이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개선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물량팀 비중 축소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4대 사회보험료 체납으로 일부 협력업체들은 정부 지원사업에 참여할 수 없고 이로 인해 종사자들도 불이익을 보고 있다. 원청은 협력업체의 보험료 성실 납부를 전제로 협력업체의 보험료 납부가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방안을 모색하고 정부는 연체금 면제, 체납처분 유예 등의 조치를 시행하며 정부 지원사업에 한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조선 5사와 협력업체는 원가 절감과 품질 향상 등으로 이룩한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 상생협력법에서 규정한 '성과공유제'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미리 약속한 공동의 목표를 달성했다면 미리 정한 방법으로 성과를 나누자는 취지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적절한 인센티브는 늘 필요하다.

이미 조선업은 정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 조선업에 특화된 '내일채움공제'를 도입, 운영 중이다. 근로자 본인이 매월 12만5000원을 적립하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37만5000원을 지원한다. 1년 근속하면 만기공제금 600만원을 준다. 자기가 낸 돈의  무려 3배를 더 타가는 금융상품이다. 고용노동부는 고용허가제 외국인력을 조선업에 최우선적으로 배정하는 등 행·재정적 지원도 강화하고 있다. 더구나 고용부는 ▲근로자의 장기 근속을 위한 다양한 인센티브 제공 ▲인력 양성 프로그램 마련 ▲원하청 공동근로복지기금을 통한 하청근로자 처우 개선 지원 확대 등을 담은 조선업 상생패키지 지원사업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조선업계를 위한 선물이 잇따라 제공되는 셈이다.

조선 5사 원·하청 대표와 이정식(앞줄 왼쪽 네 번째)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27일 현대중공업에서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을 위해 상호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제공=HD현대)
조선 5사 원·하청 대표와 이정식(앞줄 왼쪽 네 번째)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27일 현대중공업에서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을 위해 상호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제공=HD현대)

이제는 조선업계가 제몫을 할 때다. 원하청은 서로를 존중하는 파트너십을 강화하면서 이중구조 개선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이끌어내야 한다. 뿌리 깊게 박힌 이 문제를 해소해야만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지고 미래세대의 근로의욕도 제고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도 꼭 추구해야할 과제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단가기준을 책정하기 위해 기성금 지급 기준을 개선하고 기성금이 보다 투명하게 운영되도록 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노조는 다른 산업에 비해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집중적으로 받는 것을 감안, 서로 상처만 주는 노사분규를 당분간 자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울러 노동계가 상생협의체에 참여한다면 조선업 발전을 위한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게 될 것이다. 

조선업계 상생협약은 27개에 이르는 실천과제를 담고 있다. 구체적인 실행으로 이어지도록 원하청이 자율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용부와 산업부 등은 이행 여부를 평가하면서 현실 여건과 맞지 않아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협의를 통해 보완하고 필요할 경우 목표도 일부 수정하는 등 유연한 자세로 모처럼 마련된 상생의 틀이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정부는 법과 원칙의 토대 위에서 노동약자를 두텁게 보호하면서 미래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동개혁의 속도를 더 높여야 한다. 조선업을 계기로 다른 업종에도 이같은 상생 협약이 확산되면서 산업평화 분위기가 널리 정착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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