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10.18 11:54
10월 1일 끝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골프 단체전에서 장유빈(왼쪽부터), 조우영, 임성재, 김시우가 금메달을 깨물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사진=뉴스1)
10월 1일 끝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골프 단체전에서 장유빈(왼쪽부터), 조우영, 임성재, 김시우가 금메달을 깨물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사진=뉴스1)

[뉴스웍스=최승욱 편집인] 인천 송도에서 사업을 하는 최 대표는 평일 점심 시간을 전후해 인근 초대형 골프연습장에서 땀을 흘린다. 그는 갈 때마다 두 가지에 놀란다. 먼저 10여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너나없이 흠 잡을데 없는 완벽한 스윙에 호쾌한 장타를 날리는 모습에 입을 다물 수 없다. 두 번째는 하루에 몇시간씩 연습하는 이들이 죄다 방송통신중·고등학교 재학생이라는 점이다. 최 대표는 “이들로부터 운동선수들에 대한 학교 수업이 강화되면서 한달에 토요일이나 일요일 등 이틀만 출석하면 되고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돼 운동하기에 너무나 좋은 방통중고교에 진학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들의 목표는 프로선수 진출이다. 임성재와 김시우, 조우영, 장유빈 선수가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모습을 보고 '골프만 잘 치면 군대를 가지 않고 큰 돈을 마음껏 벌 수 있다'는 주변의 조언을 믿고 따르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다졌을 수 있다. 

과거 냉전 체제에서 주요 강대국 간에 금메달 경쟁이 치열했다. 소련은 유망 운동선수 조기 육성과 집중적인 단체 훈련으로 미국에 앞선 적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진국에 비해 체육시설이 부족하거나 열악하고 인구도 상대적으로 작은 한국은 학업보다는 운동에 전념하는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을 키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거나 아시안게임에서 상위권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체육정책을 펼쳐 왔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의 체제 우위 경쟁은 끝났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운동선수들이 체육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도록 규정한 병역의무의 특례규제에 관한 법률은 1973년 제정됐다. 국위를 선양할 동기를 부여한다는 차원에서 도입됐다. 1973년부터 1984년까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존재하다가 병역법과 통·폐합되면서 폐지됐다. 초기엔 올림픽, 아시안게임은 물론 세계선수권대회, 유니버시아드대회, 아시아선수권대회 3위 이상 입상자도 일정기간 군사훈련을 받고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면 병역을 마칠 수 있었다. 이후 법 개정을 거쳐 올림픽은 3위 이상, 아시안게임은 1위 입상자만이 체육분야 병역특례를 받는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은 병역법에 따라 3주 군사기초훈련을 받고 34개월 이내 544시간 봉사활동을 마쳤다.

두산베어스의 곽빈(왼쪽)과 기아타이거즈의 이의리. (사진=뉴스1)
두산베어스의 곽빈(왼쪽)과 기아타이거즈의 이의리. (사진=뉴스1)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야국 국가대표팀은 대만과의 첫 대결에서 패배한 뒤 결승전에서 다시 만나 설욕에 성공,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4명 중 19명이 군 징집이 면제됐다. 이중에서 부상으로 인해 단 한 경기도 뛰지 않고 병역 특례 대상이 된 투수 곽빈(두산베어스)에 대한 논란이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금메달을 딴 뒤 곽빈은 자신의 SNS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인데 이어 지난 13일 기아와의 홈경기에서 호투로 승리한뒤 "담 증세 때문에 감을 잃었고 이후 감기 몸살이 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곽빈의 불가피한 사정은 이해가 된다. 다만 항저우 출발 직전 대표단에서 물집 부상을 이유로 제외된 이의리(기아타이거즈)와의 형평성 시비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물론 대회에 참가를 했지만 경기운영 과정에서 감독의 결정에 따라 뛰지 못한 선수와 아예 참가하지 못한 선수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병역특례는 산업기능요원, 전문연구요원, 승선근무예비역, 공중보건의사, 예술체육요원 등을 대상으로 한다. 예술요원은 클래식음악, 발레·현대무용, 국악, 한국무용 등에서 선발된다. 31개 국제음악 및 무용경연대회 2위 이내, 5개 국내 예술경연대회 1위에게 혜택이 주어진다.

문제는 아시안게임의 종목이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e스포츠(게임)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했다. 참가국들은 '마인드 스포츠'로 분류된 게임, 바둑, 카드게임(브리지),  체스, 상치(중국식 장기)에서 메달 경쟁을 벌였다. 한국은 e스포츠와 바둑에서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땄다. 연간 수십억원을 버는 게임 스타들은 병역 혜택까지 누리게 됐다.

변상일(왼쪽부터), 이지현, 박정환, 신민준, 신진서, 김명훈 9단이 10월 3일 중국 항저우 치위안 체스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4-1로 이기고 금메달을  딴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변상일(왼쪽부터), 이지현, 박정환, 신민준, 신진서, 김명훈 9단이 10월 3일 중국 항저우 치위안 체스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4-1로 이기고 금메달을  딴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 대목에서 생각해보자. 경기를 진행하면서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e스포츠, 바둑, 카드게임 등을 언제 당할지 모를 부상 위험과 감량의 고통에 시달리며 구슬땀을 계속 흘려야하는 유도, 레슬링, 육상, 수영, 단체구기운동과 같은 반열에서 체육요원을 지정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지난 13일 병무청 국정감사에서 임병헌 국민의힘 의원은 이기식 병무청장을 상대로 “야구, 축구의 경우 미필자 중심으로 팀을 짜는 경향이 보인다”며 “아시안게임이 병역 혜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도 “병역특례가 주어지는 일부 콩쿠르 대회의 경우 참가자와 입상자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며 “과연 국제대회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 청장은 “(예술체육 분야에 대한) 보충역 제도는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며 “국방부에 건의해 태스크포스를 구성, 기본부터 살펴보겠다”고 답변했다.

보충역 제도가 도입된 1973년만해도 병역자원이 넘쳤다. 이제는 군대 갈 남성이 훨씬 줄었다. 병역기간도 종전 최대 36개월에서 18개월로 반토막이 났다. 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 상태에서 최소한의 병력을 유지하려면 중장기적으로 여성도 징집해야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런 마당에 예술체육 활동을 통한 국위선양이란 낡은 도그마를 언제까지 고집할 것인가. 

김천 상무 소속의 조영욱 상병이 10월 7일 오후 중국 항저우 황룽 스포츠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일본의 결승전에서 상대 골키퍼 사이로 역전골을 밀어넣고 있다. 그는 아시아게임 금메달 획득으로 병장이 아닌 상병으로 군복을 벗는 혜택을 누리게 됐다. (사진=뉴스1)
김천 상무 소속의 조영욱 상병이 10월 7일 오후 중국 항저우 황룽 스포츠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일본의 결승전에서 상대 골키퍼 사이로 역전골을 밀어넣고 있다. 그는 아시아게임 금메달 획득으로 병장이 아닌 상병으로 군복을 벗는 혜택을 누리게 됐다. (사진=뉴스1)

체육분야에서 남자 운동선수는 국군 체육부대를 통해 병역 의무를 이행하면서 훈련을 계속할 수 있다. 체육부대는 장병 체력 향상을 위한 교리를 연구발전시키고 체육특기자 발굴, 육성하기 위해 국방부 직속부대로 창설됐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유도, 사격, 바이에슬론, 근대 5종 등 25개 종목에서 선수를 육성한다.  

정부는 시대상황을 감안, 현행 예술체육요원제도를 원칙적으로 폐지한다는 원칙 아래 재검토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대한민국의 명성을 널리 알린 것으로 친다면 BTS의 공로를 따라갈  국민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중가요를 부른다는 이유로 군대를 가야 하고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성악자는 군 혜택을 받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사실상 국내대회에 불과한 예술 분야 국제대회부터 혜택 대상에서 과감히 제외하는 것이 맞다. 

골프스타 임성재와 김시우는 금메달 획득으로 군 복무 기간 중 수입이 급감할 우려를 덜었다. 미국을 본거지 삼아 거액의 상금을 노리면서 스폰서의 협찬 아래 프로선수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이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출전했지만 정작 한국 골프를 대표하는 매이저대회인 한국오픈에는 나오지 않는다. 미국보다 상금 규모가 훨씬 적다는 것도 이유일 것이다. 명예에 걸맞는 행동과 처신이 뒤따른다면 좋겠다. 국가대표야말로 애국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번 기회에 한국도 일본처럼 생활체육 활성화에 보다 중점을 둘 때다. 엘리트 스포츠에 투자하는 재원의 일부를 학업 부담에 시달리는 청소년이 운동을 짬짬이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풀도록 돕고 중장년층도 쉽게 체력을 단련할 수 있도록 기회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더이상 금메달 숫자는 국력의 상징이자 국가 명성을 높이는 지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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