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2.12.08 16:21
서울 강남구 대치동 미도아파트 재건축 배치계획안. (사진제공=서울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미도아파트 재건축 배치계획안. (사진제공=서울시)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역대 정권마다 국민에게 싼 값에 양질의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서울에서 임금 수준이 높은데다 복리후생 조건도 뛰어난 대기업이나 금융회사에 출퇴근하기가 쉽고 주변에 명문 학교와 공원·녹지공간이 풍부한 지역은 많지 않다. 더구나 서울은 워낙 공급에 비해 수요가 몰리다보니 주거여건이 다소 떨어지는 곳이라도 지방에 비해 집값이 비싼 실정이다. 이를 감안, 서울 주변에 신도시를 계속 지었지만 절대 거리가 멀어 통행이 불편하다는 약점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집값이 오른다해도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 상승률에 미치지 못했다. IT·벤처기업, 연구소 등이 대거 들어서면서 ‘직주근접’이 완성되고 서울 도심과의 지하철 이동거리도 짧은 성남 판교가 신도시 중에서 유일한 ‘블루칩’으로 평가 받는다.

코로나19 대유행기간 동안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집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가치도 재부각됐다. 자금력만 뒷받침된다면 하루 종일 있어도 답답하지 않은 규모에다가 틈나는 대로 산책하기 편하며 대형 쇼핑몰이나 할인마크도 가까운 곳에 있는 집에 대한 인기는 상한가로 치닫고 있다.

서울 인근에서 신도시 추가조성이 한계에 달한 상황에서 국민 눈높이에 걸맞은 집을 확보하려면 '재활용' 외에 별다른 수단이 없다. 결국 도심에 있는 노후 아파트 또는 단독·다가구주택,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을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 대체로 재개발구역은 조합원 간에 재산가치 인정과 개발 방향 등을 놓고 분쟁이 끊이지 않아 완공에 이르기까지 사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비해 아파트는 소유주의 이해관계 차이가 상대적으로 적어 신규 주택 공급기간을 줄일 수 있다. 

1980년~90년대에 지어져 준공 30년~40년이 넘는 아파트에 살면서 누수와 결로, 주차전쟁, 층간소음 등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최대 희망은 재건축이다. 물론 중대형 위주로 세워진데다 내부인테리어를 수선한 집이 대부분이고 주인들의 평균 연령도 60대를 넘어 재건축을 원하지 않는 곳도 있긴 하다.  

재건축에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재건축 안진진단을 통과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의 눈높이를 감안, 2015년 5월 ▲주거환경 ▲설비노후도 ▲구조안전성 ▲비용분석(편익)을 평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주거환경 중심 안전진단'을 도입하면서 주거환경에 대한 평가를 강화했다. 이로 인해 주거환경 점수 비중이 40%로 올라가고 구조안전성은 20%로 낮아지면서 18년 2월까지 34개월 동안 전국에서 139건, 서울에선 59건이 안전진단을 통과했다. 연평균으로 전국에서 49건, 서울에선 21건이 첫 관문을 지나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집값 폭등에 대응, 18년 3월 안전진단 평가항목 중 구조안전성을 20%에서 50%로 무려 30%포인트 높였다. 당장 무너질 정도가 아니라면 구조안전성 심사에서 만점을 받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안전진단을 인위적인 재건축 규제수단으로 활용한 결과 22년 11월까지 56개월 동안 전국에서 21건, 서울에서 7건이 안전진단에 합격했다.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전국 5건, 서울 2건에 그쳤다. 서울의 경우 재건축 대상 아파트 공급이 박근혜 정부보다 10분의 1로 급감한 셈이다. 도심에서 새 아파트를 공급할 기반이 대폭 위축된 것이다. 

가까스로 안전진단을 통과한 아파트들도 당장 재건축절차를 밟을 수 있는 '재건축'이 아니라 재건축 시기 조정이 가능한 '조건부재건축'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국토안전관리원 등 공공기관의 '적정성 검토'를 거쳐야 했다. 2차 안전진단은 민간 안전기관이 수행한 1차 안전진단 내용 전부에 대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재건축 진행 속도가 전반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재건축은 안전진단에서 정비구역 지정, 추진위 승인, 조합 승인, 사업시행 인가, 관리처분 인가를 거쳐 착공에 이르게 된다. 빨라도 수년이 소요되고 10년 이상 걸리는 곳도 적지 않다. 단계별 진행 속도를 높여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도 안전진단의 허들부터 지나치게 높였던 바람에 주민들의 불만이 거셌던 것이 사실이다.

(표제공=국토부)

국토교통부가 8일 재건축 안전진단과 관련, 구조안전성 점수비중을 50%에서 30%로 낮추고 주거환경은 15%에서 30%로, 설비노후도는 25%에서 30%로 조정한 것은 재건축을 통해 보다 나은 주거시설에서 살고자 하는 주민들의 여망을 반영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구조안전성기준보다는 10%p 높은데다 민간진단기관이 부실하게 안전진단을 실시한 사실이 적발되면 영업정지라는 제재까지 받게되는 만큼 큰 부작용은 발생하지 않을 전망이다.

(표제공=국토부)

아울러 '조건부재건축' 점수 범위를 기존 30~55점 이하에서 45~55점으로 높여 45점 이하의 경우 바로 재건축 절차에 들어가도록 한 것도 재건축의 진입 문턱을 대폭 낮춘 조치이다.

무엇보다 조건부재건축 판정을 받더라도 '공공기관의 적정성 검토를 거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명시한 점이 주목된다.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1차 안전진단 결과를 검토, 명확하게 확인된 오류나 근거자료 미흡에 대해 보완이나 소명을 요구한뒤 보완이 지연되거나 소명이 부족해 평가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돼 적정성 검토를 요청할 때에만 예외적으로 시행되도록 한다는 방침은 사실상 2차 안전진단 제도 폐지를 의미한다.뒤집어 말해 재건축안전진단에서 55점 이하만 받으면 사실상 재건축 절차에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물론 55점을 초과하면 안전진단에서 탈락,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

통상 1500세대를 기준으로 민간 안전진단기관으로부터 1차 안전진단을 받는데 2억6000만원이 들어간다. 진단기간은 3~6개월이다. 공공기관의 적정성 검토가 이뤄지는데 통상 7개월이 소요되며 이 비용은 1억원 수준이다. 적정성 검토 개선으로 이같은 기간과 비용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는 조합원과 일반분양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국토부가 내놓은 재건축 안전진단 합리화 방안은 현재 안전진단을 수행 중인 단지에도 적용된다. 서울의 200가구 이상 아파트 중 지난 1월 현재 건축연령이 30년을 지났지만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한 단지는 389곳에 달한다. 노원구가 79개로 가장 많고 강남 46개, 도봉 34개, 송파 23개, 강서·양천 각 22개이다. 그간 안전진단에서 '유지보수' 판정을 받아 재건축이 좌절되었지만 이번 개선방안을 적용할 경우 '조건부 재건축' 판정이 내려질 수 있는 단지는 서울 4곳, 경기 4곳, 부산 2곳, 대구 3곳, 경북 1곳이다. 재건축을 희망하는 아파트 단지들이 안전진단을 통과하기가 대폭 수월해진 만큼 향후 재건축 공급 기반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공급이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면 집값도 안정될 확률이 커진다.

국토부가 아파트값이 연일 떨어지는 시점에 재건축 규제의 핵심을 푼 것은 추가하락 속도를 다소 늦추고 폭도 줄여주면서 연착륙을 유도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이번 안전진단 개선 방안은 행정예고와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을 거쳐 내년 1월 중 시행될 예정이다. 시장에 곧바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11월에 착수한 '1기 신도시 정비기본방침 및 특별법안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 과정에서 이번 개선방안의 적용효과를 분석한뒤 필요시 내년 2월 발의예정인 '1기 신도시 특별법'에 추가적인 제도개선 방안을 별도로 마련하겠다는 국토부 방침도 시의적절하다. 

시장 수요에 맞춰 안전진단 제도를 손본 것은 타당하지만 정책의 일관성 유지 위반과 예측가능성 결여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2003년 7월 '주택 재건축 판정을 위한 안전진단 기준'이 제정되면서 45%를 차지했던 구조안전성은 06년 5월 50%, 09년 1월 40%, 15년 5월 20%, 18년 3월 50%를 거쳐 22년 12월 30%로 변동을 거듭해왔다.

정부는 국민의 주거여건 향상에 부동산 정책 목표를 설정하고 날로 변화하는 수요에 부응, '착한 공공주택'이 서민들도 부담 가능한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부동산 경기 흐름에 따라 규제와 완화를 반복한 끝에 결국 공급 부족으로 집값 상승을 부채질해왔던 행태가 더이상 반복되어선 곤란하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안전진단 제도를 뜯어고쳐온 병폐에서 이제야말로 벗어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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