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우성숙 기자
  • 입력 2023.01.18 06:00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의 사의 표명이후 전경련의 쇄신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전경련은 일반적으로 재계의 이익단체로 알려졌지만 1961년 설립 이래 활동을 보면 오히려 경제·사회발전에 큰 기여를 해왔음을 알게 된다. '재계의 맏형'이라는 닉네임은 거저 붙여진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전경련 공채 13기로 입사해 전경련에서 상무이사를 지낸 뒤 SK, 금호, 효성 등에서 사장 등 고위 임원으로 활약했던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가 선정한 전경련의 빛났던 10대 순간을 연재한다. 쇄신을 요구받는 전경련의 향후 진로에 큰 도움이 될 듯하다.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한국 재계가 기업활동 외에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다른 분야를 꼽자면 '민간경제외교'를 꼽을 수 있다. 외자 도입, 수출 시장 다변화 등 기업활동에 대한 직접적 이득 못지않게 대외신인도 제고 등으로 국민의 자부심을 한껏 드높이는 큰 역할을 한 것이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재계 인사들은 "백성이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굴뚝에서 연기가 나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서 두 차례에 걸쳐 미국과 유럽지역에 외자유치단을 파견해 외자 도입을 성사시켰다. 

당시 세워진 비료 공장, 라디오 공장, 정유 공장이 바로 이 돈으로 지어졌다. 미국 US스틸과 추진하려던 종합제철소 건설을 일본제철이 하게끔 바꾼 것도 김주인 전경련 초대 사무국장을 비롯한 경제계였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간 '불미스러운 과거지사'에서 온 굴곡된 감정을 냉정한 경제논리로 바꾸기 위해 경제 사절단을 수시로 교환했다.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6월) 이전에 이미 양국 재계는 한·일 경제협력기구의 설립에 합의했고, 이듬해에는 한·일 합동경제간담회를 도쿄와 오사카에서 개최했다.

외자 유치와 수출시장 개척을 위한 재계의 경제외교는 일본에 이어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과의 양자 간 경제협력위원회 구성으로 시작돼 구체적인 사업 추진으로 발전한다. 

한·영 경협위를 통해 현대는 조선소를 만들고 한·불 경협위를 통해 한진은 파리에 취항해 유럽 항로 개척이라는 숙원을 이뤘다. 재계는 또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을 앞두고 독문판 한국 소개책자를 제작·증정해 서독에서 한국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73년 10월의 중동전쟁으로 야기된 오일쇼크는 우리나라에 큰 타격을 줬다. 그러나 경제계는 베트남 파병에 따른 건설용역의 해외 진출 경험을 살려 오일쇼크의 충격을 능동적으로 수용해 낼 수 있었다. 한·사우디 경제협력합동위원회를 통해 잉여자금도 유치했다.

우리 기업의 대형화 국제화가 보다 빨리 추진될 수 있는 계기도 민간경제외교의 성과다. 1988 서울올림픽 유치나 2002 월드컵, 2012 여수엑스포, 그리고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이르기까지 재계의 민간경제외교 경험은 큰 힘을 발휘했다. 또한 한국의 발전된 위상을 홍보하고 국민적 자부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는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 한·중 수교 이전에 이미 우리 기업의 앞선 기술, 자본이 필요했던 옛 사회주의 국가는 한국에 경제사절단을 요청했다. 한·소 경제인합동회의(1987년 7월)가 대표적이다.

지금은 상례적이지만, 대통령 수행 경제인단 파견도 전경련의 주도로 1981년 5월에 처음 시작됐다. 당시 전략 지역에 대한 민관 공동대응 협력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된 대통령 수행 아세안 순방 경제사절단은 현지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고 부수적으로는 많은 경협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성과를 올렸다. 

아세안에서 촉발된 지역 경제권과의 협력 전략은 그 후 EU(유럽연합),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등으로 발전했고,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등 지역경제 협력기구 내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1996년 10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에 앞서 OECD 민간자문기구인 BIAC에 1994년 가입, 14개 전문 분야별 위원회 활동을 통해 선진국 간 경제정책 수립·시행 과정에서 한국 경제계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채널을 선제 확보했다.

이는 또 다자간 협상에서 민간통상외교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체결이 본격화한 FTA(자유무역협정)의 근간도 이러한 앞선 정보력과 재빠른 활동을 통해 이뤄졌고, 우리의 경제 영토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 저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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