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우성숙 기자
  • 입력 2023.01.17 17:43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의 사의 표명이후 전경련의 쇄신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전경련은 일반적으로 재계의 이익단체로 알려졌지만 1961년 설립 이래 활동을 보면 오히려 경제·사회발전에 큰 기여를 해왔음을 알게 된다. '재계의 맏형'이라는 닉네임은 거저 붙여진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전경련 공채 13기로 입사해 전경련에서 상무이사를 지낸 뒤 SK, 금호, 효성 등에서 사장 등 고위 임원으로 활약했던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가 선정한 전경련의 빛났던 10대 순간을 연재한다. 쇄신을 요구받는 전경련의 향후 진로에 큰 도움이 될 듯하다.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언제 오셨습니까?" 

1961년 6월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은 이병철 삼성 사장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안부 인사를 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들에게는 별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그래도 이병철은 계속했다. 기업인은 사업을 일으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 본분이니, 그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경제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짧은 만남 후, 당시 메트로호텔에 연금됐던 이병철 사장은 이틀 후 풀려났다. 부정축재자로 구속됐던 기업인도 곧 석방됐다. 

당시 구속됐던 기업인 중에는 작고한 최태섭 한국유리 사장도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장로였던 최 사장은 재계의 청지기라 불릴 정도로 당당한 기업활동을 했다. 그래서 구속 중에도 늘 여유 있고 겸손했다. 당시 한 취조관은 최태섭의 이런 인품에 매료돼 한국유리 경비책임자를 자원, 평생 근무했다고 한다. 

이런 올곧은 성품 때문일까. 석방될 때 군사정부 주요 간부는 그에게 경제 건설을 위한 경제단체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최 사장의 이야기를 들은 기업인 13명은 석방 이튿날인 7월 15일 '경제재건촉진회'로 이름 지어진 기간산업을 건설하는 실천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재건촉진회는 같은 해 8월 8일 이사회를 열었다. 그리고 설립의 취지대로 13명 회원이 하나씩의 기간산업을 책임지고 추진하기로 했다. 양회공장은 쌍용의 전신인 금성방직(홍재선), 비료공장은 삼성(이병철)과 삼호(정재호), 전기는 대한제분(이한원)이 맡기로 했다. 

또 제철은 대한양회(이정림), 극동해운(남중련), 대한산업(설경동), 동양시멘트(이양구) 등이, 화학섬유는 화신(박흥식), 조선견직(김지태), 한국유리(최태섭) 등이 합작으로 건설하기로 했다.

이들 기간 산업에서의 성패가 1960년대 고도성장기 이후 한국 재계의 지도를 바꾸게 된다.

경제촉진회의 회장은 최태섭, 이정림, 설경동, 이병철 등이 거론됐으나, 서로가 사양하다가 이병철 사장으로 합의됐다. 이후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을 바꿔 1961년 8월 16일 임시총회에서 이병철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고 이것이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 됐다. 

돌이켜보면 전경련 회장은 창립 때부터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리를 탐하지 않는 겸양의 정신 속에서 기간산업 육성으로 나라를 재건하자는 책임감이 전경련을 재계의 본산으로 자리 잡게 할 수 있었다.

기간산업의 육성에는 의지 못지않게 자금이 중요한 법이다. 경제인협회는 협회 설립 한 달도 되지 않아 획기적인 '외자도입 수용체제와 촉진책'을 마련해 건의했다.

이들은 후손들에게 '부정축재자'라는 오명은 남기고 싶지 않겠다며 공장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회장을 맡은 이병철은 필사의 심정으로 외자 도입까지 성사시켜야겠다고 각오했다. 그래서 11월에 미국과 유럽에 외자 유치 교섭단을 잇달아 파견시켰는데, 미주지역은 본인이 직접, 유럽지역은 협회 부회장이었던 이정림이 단장으로 갔다. 

당시 사절단의 활동에 걸프 등의 기업이 관심을 가졌고, 뒤에 걸프는 울산정유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유럽지역에서도 독일에서만 금성사, 한일시멘트 등에서 2500만달러의 차관 교섭에 성공했다.

1년 사이에 두 번이나 정변을 겪었던 나라에 누가 돈을 꿔 줄 것인가. 그러나 경제인들은 이를 해냈고 그 후 공업 발전, 나아가 한강의 기적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961년 협회가 창립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인을 '실업인'으로 많이 불렀다. 그러나 한학에 조예가 싶은 이동준, 조홍제 회장의 선창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빌어 '경제인'이라는 이름을 협회에 넣었다. 관치의 냄새가 나는 '재건'이라는 단어도 떼었다. 돈을 빌릴지언정, 뜻은 나라를 위해 펼치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한국경제인협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 이름을 바꾸고 울산공업단지 건설, 창원 구로수출산업공단 구축, 사채동결 건의, 한국경영자총협회 창립, 민간금융기구 설립, 기업의료보험 도입, 88 서울올림픽 유치 등을 추진하면서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로 성장했다.

더불어 미국·일본·유럽·동남아 등 해외 경제계와의 제휴를 통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선도하고 중동·아세안 등 해외 시장 개척의 디딤돌을 마련했다. 전경련의 회장은 '재계의 총리'로 불리며 한국 경제의 발전을 선도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