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지운 기자
  • 입력 2023.02.08 00:01
(사진제공=H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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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웍스=한지운 기자] 한국 경제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수출 한국'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11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어서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며 수출을 돕겠다고 나선 것도 이 같은 위기상황이 반영됐다. 문제는 대통령마저 나섰는데 기업의 수출을 전방위로 지원하며 앞장서 뛰어야 할 한국무역협회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역적자가 1년 가까이 이어지며 심화하고 있는데도 이를 타개하기 위한 무역협회의 움직임을 좀처럼 찾아볼수 없다는 얘기다.

무역협회의 소극적인 태도는 대통령이 영업사원을 자처한 이후에도 변한게 없다. 그것도 1월 한 달에만 126억9000만달러라는 상상치도 못할 최악의 무역적자가 났는데도 요지부동이다. 1월 무역수지 적자는 금융위기가 몰아친 2008년 연간 무역적자(132억7000만달러)에 육박하는 규모다. 불과 한 달 만에 금융위기 당시 1년 치의 무역적자를 본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연간 무역적자 경신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한해가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이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역대 최대 무역적자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직전인 1996년 기록한 206억2000만달러다.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국가 경제의 근간이 송두리째 뽑혀 나갈 수도 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미증유(未曾有)의 벼랑 위에 서 있는 형국이라는 얘기다.

해외에서도 한국의 무역적자가 심상치 않다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더 이코노미스트 최근호는 한국이 지난해 475억달러의 무역적자를 봤는데, 이는 1956년 기록을 시작한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적시했다. 일각에서는 한국 수출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한국 경제가 되돌릴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이고 있다.

수출이 우리 경제와 직결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고, 모두가 힘을 모아 수출 기업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출 기업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이들의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무역협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 무역협회의 모습을 보면 이런 역할을 할 생각이 있는지, 무역적자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지를 가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위기감의 부재와 안일한 태도는 무역협회가 지난해 말 내놓은 수출 전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저성장·고물가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무역수지가 적자를 내기 시작한 지난해 상반기부터 이미 위기 신호가 나타났는데도 무역협회는 지난해 12월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수출이 전년 대비 4% 감소하고, 무역적자는 138억달러 기록할 것으로 낙관했다.

이 예상은 한 달 만에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 달 치 결과이긴 하지만, 1월 수출 감소 폭은 전망의 4배에 달하는 16.6%를 기록했고, 무역적자는 무려 연간 예상치에 육박했다. 현실을 바탕으로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수출 기업에 전달하는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무역협회의 수출 관련 연구보고서의 숫자도 줄어드는 추세다. 월이나 분기마다 나오는 정기보고서를 제외하고, 협회 사이트에 게시된 연구보고서의 수는 2020년 72개, 2021년 62개, 2022년 56개로 줄었다.

수출 진흥과 무역업계의 권익증진을 위한 대외 활동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역협회 한 관계자는 "5년 전부터 무역협회의 대외 활동이 대폭 줄었다"며 "이는 회장의 개인적 성향 탓이 크다. 그러나 수출 진흥을 주목적으로 하는 무역협회 조직의 무게상 그래서는 안 될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관계자는 "회장이 조용하니 좋다는 반응도 있지만, 상당수 직원에게서는 일을 안 하니 무역협회의 존재감이 없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오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는 회원사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한 회원사 관계자는 "수출 기업으로서 겪는 애로와 규제 해소를 몇 차례 협회에 건의했지만, 실제로 협회가 움직이거나 반영된 사례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다른 경제단체보다 소극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무역협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회장의 리더십 부재 탓이 크다는 게 내외부의 시각이다. 그간 무역협회장은 전직 관료나 민간기업 회원사 대표들이 맡아왔다. 관료 출신이나 민간기업 출신 모두 장·단점은 있지만 관료 출신이었을 경우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관료 출신의 경우는 무역협회장 자리를 더 높은 자리로 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역대 회장 가운데 박충훈(서리), 유창순, 신병현(직무대행), 남덕우, 한덕수 현 국무총리의 사례와 같이 무역협회장 자리는 국무총리로 가는 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니 단순히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욕심을 내 성과를 창출하려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료 출신 회장을 거쳐 지난 2021년, 15년 만에 민간기업 총수가 회장에 취임했다. 무역협회장에 오른 구자열 LS그룹 이사회 의장은 고(故) 구평회 회장에 이어 부자(父子)가 취임하는 기록을 남기며 남다른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현재의 평가는 엇갈리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민간 출신 협회장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뿌리 채 흔들리는 위기 상황에서는 내·외부를 조율할 수 있고, 무엇보다 정권과 소통할 수 있는 힘 있는 관료 출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고 있다. 무역협회 임원을 지냈던 한 관계자는 "지금 상황에서는 일 욕심이 있는 관료 출신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며 "리더십과 실행·기획력이 있고, 무엇보다 정권과 두터운 네트워크가 있는 신정권 인사가 최적일 것"이라고 고언(苦言)했다.

자국 중심주의가 표면화되며 점점 복잡해지는 세계 무역 환경에서 세계 6위 수출국인 대한민국과 우리 기업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향후 1~2년이 좌우할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역협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기업의 수출 비즈니스가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무역협회와 같은 무역 유관기관이 후방이 아닌 전방으로 뛰쳐나가 해법을 도출해야 해서다. 그렇게 해도 위기를 타개할지는 미지수인데, 현재 무역협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무역협회가 존재감을 되찾아야만 대한민국 수출이 살아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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