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03.06 16:05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외교부청사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KTV국민방송 유튜브 캡쳐)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외교부청사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KTV국민방송 유튜브 캡쳐)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1965년 6월 한국과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청구권협정)을 맺었다. 양국과 국민(법인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4조에 포함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했다. 

협정문을 살펴보면 되돌리기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다. 법리적인 하자없이 체결돼 재협상할 여지조차 남겨 놓지 않았다. 한마디로 불가역적이다. 그만큼 일본이 문안을 자국에 유리하도록 치밀하게 마련한 것이다. 이에 비해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경제발전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 등 5개 조약을 맺는데 급급했다. 일본의 반대로 기본조약에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도 명시하지 못했다. 

일본은 한국에 무상 3억달러, 차관 2억달러를 제공하기로 했지만 한국은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반출해간 금, 은 등 수많은 재산과 권리를 포기한 것이 드러나면서 굴욕적인 협상이었다는 비판이 숱하게 제기됐다. 달러나 엔화가 아닌 현물이 포함됐으며 중고품이나 재고품도 많았다. 

이런 점에서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한일 양국의 채권·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해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국내 법원 판단도 나왔지만 외국에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국제법으로 인정되는 협정을 이미 체결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박 대통령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소를 짓고 경부고속도로를 뚫었다. 이후 한국은 공업화에 성공, 이제 'G 10' 대열에 들어갔고 수차례에 결친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선진국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청구권협정의 약점이 드러나면서 국가간 협상으로 인해서 개인청구권까지 소멸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에 주목, 강제동원 피해자인 여운택·신천수씨는 1997년 12월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졌다. 노무현 대통령 정부 시절 2005년 민관 공동위원회가 꾸려져 7개월간 논의했지만 정부가 피해보상을 다시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 법원도 한일청구권협정 취지에 따라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야먀구치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위패,. (사진=일제강제공원피해자지원재단 공식 블로그 캡처)
일본 야먀구치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위패,. (사진=일제강제공원피해자지원재단 공식 블로그 캡처)

여운택·신천수씨는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받은뒤 다른 피해자 2명과 함께 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1,2심에선 졌다. 2012년 5월 대법원 제1심은 승소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당시 주심인 김능환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밝혔다. 한일청구권협정의 효력을 사실상 부인하고 개인청구권이 살아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한일관계 악화는 불가피해졌다. 

사법부 판단이 못내 아쉬웠지만 대통령과 행정부는 개입할 수 없었다. 서울고법은 2013년 7월 1명당 1억원씩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자 신일철주금은 이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했다. 재상고심을 거쳐 2018년 10월 대법원은 전원합의체에서 신일철주금에게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소송이 장기화되면서 원고 4명 중 3명은 이미 배상금을 받지 못하고 숨졌다.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온 이춘식씨의 나이는 당시 98세였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오자 일본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극렬 반발했고 원고 기업 역시 배상에 나서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 판결 동향을 살펴보려던 박근혜 정부의 움직임을 사법농단으로 낙인찍으면서도 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기보다 반일감정을 교묘하게 부추기며 정치적 실익을 챙기는데 주력했다. 무엇보다 언제 숨질지 모를 고령의 피해자가 실제 배상을 받도록 하는데 주력하기는커녕 폭탄돌리기에 급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법원이 확립한 판례는 흠결이 적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은 2021년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 기업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 판결한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대법원의 판결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양대  사건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설득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외교부청사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사진=KTV국민방송 유튜브 캡처)
박진(가운데)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외교부청사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사진=KTV국민방송 유튜브 캡처)

박진 외교부 장관은 6일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원고기업을 대신해 강제동원 피해자 15명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한다는 '제3자 변제' 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필요한 재원은 포스코 등 대일청구권 자금의 도움을 받은 기업의 출연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정부의 이같은 방침은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일본 정부의 입장이 워낙 확고한데다 이를 뒤집을 힘도, 논리도 없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일본 피고기업의 배상 참여를 강제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 예상대로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야당과 진보시민단체는 이날 일제히 반발했다. 외교사에 길이 남을 치욕이자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면죄부 인정이란 비난도 쏟아졌다. 결국 일본이 강제동원 현안에 완승한 것으로 끝나면서 분노 또는 허탈함을 느끼는 국민들도 많다.

그렇다고 국교 정상화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양국 관계를 계속 방치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법원 판결이후 4년여가 지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고도화는 날로 진전되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은 가속화되고 있다. 여기에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속 중이다. 이런 국제 외교안보 정세 변화 속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가 먼저 양보하자는 뜻을 담아 대승적 결단을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그간 수차례 사과했던 일본 정부에 새로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인데다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앞서가려고 하는 한국이 추구할 가치도 아니다. 

이제는 일본 몫이다.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성격이 들어있는 반도체 수출 규제를 해제하고 한일 정상간 셔틀외교 복원에 나서는 등 후속조치에 나서야 할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날 참의원에 출석, 한일 관계에 대한 의원 질의에 "역사 인식에 관해서는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해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담은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계승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지나치게 원론적이다.

조 바이든 미극 대통령은 이날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역사적인 외교장관 담화를 통해 더 안전하고 보다 안심할 수 있으며 보다 번영하는 양국 국민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중차대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며 "오늘 한국과 일본의 발표는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 간의 협력과 파트너십에 신기원적인 새 장을 장식할 것"이라는 환영성명을 냈다. 한국과 일본은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외교경제 관계 정상화에 서둘러 나서달라는 주문으로 해석된다. 

국립일제강제동원 역사관 7층 추모공원 추모탑 (사진=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유튜브 캡처)
국립일제강제동원 역사관 7층 추모공원 추모탑 (사진=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유튜브 캡처)

남은 과제는 피해자와 유족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번 결정의 불가피성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양국에 대한 호감도가 기성세대보다 훨씬 높다. 과거사에 연연한 나머지 일본을 계속 죄악시한다고 해서 우리가 얻을 것이 과연 무엇일까. 미래의 선린 우호관계 조성을 통해 한일 양국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인권을 지키는 모범국가로서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라는 역사의 철칙에서 한국과 일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국 정부가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먼저 양보한 만큼 일본 정부과 정치권이 행동에 나설 차례다. 기시다 총리 등 내각과 자민당은 양국관계가 보다 튼튼해질 수 있도록 성의 있는 후속조치를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이 어렵게 내놓은 손을 이번에야말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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