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08.09 14:55
서울아산병원 폐암수술팀이 암환자를 대상으로 집도하고 있다. (사진제공=서울아산병원)
서울아산병원 폐암수술팀이 암환자를 대상으로 집도하고 있다. (사진제공=서울아산병원)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전국에서 환자가 집중되는 서울 '빅5' 상급종합병원의 병상은 비는 날이 드물다. 수술 일정을 감안, 특실이나 1인실에 입원한 뒤 병상이 비는 다인실로 옮기기 일쑤다.  

2022년 현재 전체 병상 수는 58만개로 2011년(45.1만개)보다 28.6% 늘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인구 1000명당 병상 수 통계를 보면 한국의 일반병상 수는 OECD 평균의  2.1배, 요양병상 수는 8.8배에 달한다.

이미 주요국보다 많은 병상 수는 더 늘어난다. 현재 대학병원 등 7개 의료기관이 9개 분원 설립을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2030년까지 수도권에서 6000병상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규모의 경제를 충족시키는 적정 병상 규모로 통상 300~400병상이 거론된다. 300병상 이상을 갖춘 대형병원은 수도권과 대도시에 집중돼 있고 300병상 미만의 중소병원은 지방 중소도시에 주로 분포돼 있다. 전체 병상에서 300병상 미만 비율은 67%로 일본(52.3%), 미국(49.1%)보다 높다.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병상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수술실 전경(사진제공=경기도)
수술실 전경(사진제공=경기도)

문제는 경쟁국에 비해 소형병원을 중심으로 과잉공급된 병상이 의료비 증가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00병상 미만 병원의 입원환자 평균 재원일수는 22.1일로 100~299병상(9.1일)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30~100병상 병원은 병상이용률이 51.9%에 불과하다. 각종 사고에 따른 보험금을 최대한 타내려고 장기 입원치료를 고집하는 '나이롱환자'가 몰려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건강보험 총 진료비가 2011년 46조원에서 2021년 93조원으로 2.0배 늘어나는 동안 입원 진료비는 15조원에서 34조원으로 2.27배 증가했다. 총 진료비에서 입원 진료비의 비중도 33.4%에서 37.1%로 높아졌다. 병상을 사용하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도 증가한 셈이다.   

2020년 현재 평균 병상이용률은 72.8%로 의료전문가들이 판단하는 적정 병상이용률 85%에 비해 12%p 이상 낮다. 그만큼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상급종합병원이 93.0%, 5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이 85.3%인데 비해 30~99병상 병원은 51.9%, 100병상~299병상 종합병원은 68.8%에 그친다. 기능전환 등을 통해 중소병원 병상 이용률을 높이는 대책 마련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병상이 크게 늘어난데에는 보건복지부의 책임도 크다. 규제완화 차원에서 대진료권 연도별 병상상한제가 1990년 폐지됐고 종합병원 병상 신증설 사전 승인제도도 1994년 없어지면서 대학병원은 수도권과 핵심 대도시에 분원을 설치하면서 몸집을 불려나갔다. 이로 인해 중증환자들이 수도권과 대도시 대형병원을 더 찾게 되면서 중소병원의 경영난은 심화됐다. 

현행 의료법은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을 개설하려면 시·도 의료기관개설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도지사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현실은 딴판이다. 병원이 새로 생기면 임차 수요 발생에 따른 지역상권 활성화, 환자 유치 등에 따른 유동인구 증가 효과 등을 감안해 형식적인 심의가 이뤄질 뿐이다. 절차상 건물을 완공하고 난 뒤 개설허가를 신청할 수 있는데 다 지어놓은 병원의 허가를 막을 단체장은 없다.

복지부도 이런 점을 인정한다. 복지부는 '알기쉬운 정책 제3기 병상수급기본계획' 자료에서 "사실상 의료기관 개설은 신고제로 운영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밝혔다.  

(인포그래픽제공=복지부)
(인포그래픽제공=복지부)

뒤늦게 복지부는 수도권·대도시에 과도하게 집중된 병상의 추가 공급을 막는 방안을 10일 내놓았다. 인구수와 인구당 입원환자수, 평균 재원일수, 병상이용률, 건강보험 및 의료급여비율, 유출입지수 등을 분석해 병상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은 지역에서는 병상이 더 늘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골자다. 지속가능한 보건의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내년부터 의료기관을 신설 또는 증설할 때 100병상 이상은 부지를 매입하기 앞서 시·도 의료기관개설위원회의 사전 심의와 건물 완공후 '사전 심의서 통과 확인'이란 승인 절차를 거쳐야만 개설허가를 받을 수 있다. 새로 병원을 만들거나 1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이 병상을 추가하려면 투자에 앞서 미리 '개설허가'를 받도록 규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각 시·도는 병상관리 기준을 바탕으로 지역별 의료 이용, 의료 생활권 등 지역 상황을 고려해 10월 말까지 병상수급 및 관리계획(관리계획)을 수립, 복지부에 제출해야 한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이 8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기 병상수급 기본시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스1)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이 8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기 병상수급 기본시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스1)

내년부터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이 병상을 늘리거나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이 분원을 개설하려면 더욱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보건복지부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의료법 개정이 추진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당 의료기관은 개설허가 신청 시 의료인력수급계획을 반드시 내야 한다. 가뜩이나 공급이 부족해 인건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지방 의료기관 전문의 영입을 방지하려는 조치로 분석된다. 인구 10만명당 근무 의사 수는 서울이 305.6명인 반면 경북은 126.5명에 불과하다. 복지부는 이를 위해 의료법 개정안을 곧바로 발의한다. 가급적 올해 정기국회에서 통과되도록 국회의원들의 동의를 얻어갈 방침이다.

복지부는 '제3기 병상수급 기본시책'(2023~2027)을 통해 현 추세가 지속되면 4년 뒤인 2027년에는 약 10만5000병상이 과잉 공급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수도권에 병상이 더 늘어날수록 지방의 의료인력이 수도권에 쏠리는 부작용도 커질 수밖에 없다.

(자료제공=복지부)
(자료제공=복지부)

내년 1월부터 전국의 70개 중진료권을 '2027년 병상 수급분석' 결과 등에 따라 ▲공급 제한 ▲공급 조정 ▲공급 가능 지역으로 분류한다는 결정이 주목된다. 공급 제한 및 조정 지역으로 지정되면 병상 신·증설이 제한된다. 다만 지역 내 공공의료를 담당하는 응급·분만 등 필수의료 기능과 감염병 대응, 권역 책임의료기관 중심 네트워크 구축 등에 필요한 병상은 과잉 공급지역이라도 예외적으로 증설을 허용할 계획이다. '지역가산 수가제'를 설계, 시행하는 과정에서 병상 과잉 여부를 고려, 공급제한지역에서 병상 감축과 전환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공급 조정지역은 신·증설을 제한하면서 일반병동을 재활병동 등으로 바꾸는 등 기능 전환을 추진한다. 이에 따른 인센티브가 납득할 수준에 이르러야만 구조조정 동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인포그래픽제공=복지부)
(인포그래픽제공=복지부)

복지부는 시·도 병상수급 및 관리계획이 시행되는 2024년 1월 이전에 의료기관 개설 및 병상 증설 등을 추진하면서 건축허가 등 법적·행정적 조치를 이미 진행 중인 경우에는 신뢰보호 원칙에 따라 의료기관 개설을 불허하지 않기로 했다.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행정소송으로 가면 진다는 점을 의식한 결정이기도 하다. 물론 시행 이후 새롭게 추진되는 개설 및 증설은 계획에 적합하지 않다면 허가를 받을 수 없다. 의료법 개정안이 연내 국회에서 의결될 것에 대비, 건축허가 등을 절차를 빨리 진행하기 위한 의료기관의 움직임이 바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병상 추가증설을 막으면서 기존 병상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병상 당 적정 간호인력을 확보하고 병상 시설 기준을 강화한다는 방침은 시의적절하다. 병원이 간호인력을 많이 배치할수록 재정지원을 많이 받도록 간호인력 지원수가가 개편되면  간병인 의존 비율이 낮아지고 과중한 근무에 시달리는 간호사의 부담도 다소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복지부는 간호등급제 하한선을 강화, 법률상 인력 기준을 준수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은 병원에 대해서는 ▲감산폭 대폭 확대 ▲명단 발표 ▲과징금 대폭 상향 등으로 강경 대응하기로 했다. 감염병 예방 등 안전한 의료환경 조성을 위해 환기, 병상 수 기준 등 병상 시설 기준도 높인다.

(인포그래펙재공=복지부)
(인포그래펙재공=복지부)

복지부의 이번 결정으로 흑자를 내고 있는 병원의 가치가 오를 수 있다. 특히 병상수가 많은 것으로 지적된 요양병원은 내년이후 신규 개설이 전면 허용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점을 노리고 의료법인 대표자 교체와 대표자 가족의 임직원 배치 등을 통해 실질적인 경영권을 몰래 넘기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 제보와 신고를 통해 이런 불법 매매행위가 자행되지 않도록 정부와 지자체는 관리감독을 강화해야할 것이다.

지역별로 병상 수가 적절하게 관리된다면 국민이 사는 곳에서 적정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불필요한 병상 증가를 막아 보건의료체계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높이고 지역간 의료격차 심화를 막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임무이다. 향후 5년간 기본시책을 제대로 적용한다면 무분별한 병상 증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기존 병상을 강제로 줄일 수는 없다. 불필요한 병상이 자연스럽게 줄어들도록 건강보험수가 개편을 통해 대응하고 병상이용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병원 등으로 탈바꿈하도록  유도하는 노력이 뒤따라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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