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12.19 17:17

"재판기한 준수 '강행 규정' 어긴 판사 재임용 탈락 조치 필요"

대법원 청사 (출처=대법원 홈페이지)
대법원 청사 (출처=대법원 홈페이지)

[뉴스웍스=최승욱 기자] 사람들이 채권·채무나 투자 등으로 다투다가 종종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말이 “법대로 하자”이다. 여기에는 판사가 양심과 자긍심에 의거한 판결을 통해 옳고 그름을 가려줄 것이라는 희망이 내포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헌법은 27조 제3항에서 ‘모든 국민은 신속히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재판이 너무 늦게 진행되면서 원고가 숨지거나 손해 회복이 지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문이다. 이런 헌법 규정과 달리 법원은 빠른 재판 진행 의무를 어기면서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민사소송법 199조는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 선고하고 항소·상고심은 기록을 받은 날로부터 5월 이내 선고하라고 규정한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21조도 형사소송의 경우 1심은 공소가 제기된 날로부터 6개월 이내, 항소·상고심은 기록을 송부 받은 날로부터 4개월 이내 선고하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일선 재판 현장에선 사문화된지 오래다.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민사합의부 1심 재판기간은 2017년 293일에서 2022년에는 420일로 43% 늘어났다. 규정된 기간인 150여일의 2.8배에 달한다. 같은 기간 중 1심 판결이 2년 내 나오지 않는 장기 미제 건은 민사재판에서 3배, 형사재판의 경우 2배 증가했다.  

물론 판사들의 고충은 이해된다. 맡은 사건이 증가한데다 사안의 복잡성도 높아져 심리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피고인의 방어권도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법관 기피, 참여재판, 위헌제청 결정 신청, 검찰 조서 부동의 제도 등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피고인과 변호인 측의 사법방해 행위가 진화되면서 재판 지연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의 잘못도 적지 않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가 폐지되고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실시되면서 승진을 위한 초과근로는 구시대의 유물로 내몰렸다. 동료와 후배판사로부터 인기 얻기 경쟁이 확산되면서 ‘정시출근-정시퇴근’의 워라벨 문화가 정착됐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이 19일 '재판지연 사법방해 대책 세미나'에서 개회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잔=원성훈 기자)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이 19일 '재판지연 사법방해 대책 세미나'에서 개회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잔=원성훈 기자)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은 19일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과 공동주최한 ‘재판지연 사법방해 대책 세미나' 개회사를 통해 “선거법 위반사건의 처리기간은 정치인의 당적에 따라 길고 짧음이 나누어진다”며 “특정 인물에 대한 판결선고를 지연시키기 위한 조직적 사법 방해 행위는 도를 지나치다 못해 국가 사법시스템을 조롱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최강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등 민주당 인사들에 대한 형사재판이 장기간 지연된 것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분석된다.

황운하 민주당 의원과 한병도 민주당 의원은 2020년 1월 기소된 후 3년 10개월 만인 11월 29일에야 1심 선고를 받았다. 황 의원은 징역 3년, 한 의원은 무죄 판결이 났다.

이에 앞서 지난 9월 대법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된 최 전 의원은 1심과 2심을 거치는데 2년 4개월, 대법원에서 1년 3개월이 소요돼 임기의 83%를 채운 시점에서야 의원직을 잃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후원금을 유용한 혐의로 2020년 8월 기소되면서 민주당을 탈당한 윤미향 의원은 지난 2월 1심에서 벌금 1500만원을, 지난 9월 항소심에선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에 상고한 만큼 국회의원 임기 중에 확정판결이 나올지 불투명하다.

유 의원은 “국민들이 법원에 가장 바라는 것은 신속한 재판 구현과 이를 통한 사법부의 신뢰 회복”이라며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악의적 사법방해를 통해 법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를 엄중히 다스려 훼손된 법치주의를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사법부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조계의 오랜 격언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처지다. 합리적이고 명확한 사유 없이 재판이 늦어진다면 누구로부터도 믿음을 받을 수 없다. 사법부가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하지 않고 법률 규정까지 어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이호선(왼쪽 두 번째) 국민대 법대 교수와 문흥수(네 번째) 한변 사법제도정상화위원회 위원장이 19일 열린 세미나에 참석, 행사 진행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원성훈 기자)
이호선(왼쪽 두 번째) 국민대 법대 교수와 문흥수(네 번째) 한변 사법제도정상화위원회 위원장이 19일 열린 세미나에 참석, 행사 진행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원성훈 기자)

문흥수 한변 사법제도정상화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재판지연, 사법방해의 현실과 대책’ 발제에서 “김명수 코트에서 일선 판사들을 중심으로 3·3·3 캡과 오후 6시 이후 야간 재판을 안 하는 경향이 확산됐다. 심지어 ‘나홀로 열심히 하면 다른 재판부에 눈치가 보이는 분위기가 돼 버렸다'고 한다”고 전했다. 3·3·3 캡이란 매달 판결문을 주 3건씩, 3주 동안 총 9건을 작성하고 마지막 한 주는 쉬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재판 지연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법관수 증원을 위해 한시적으로 임용에 필요한 경력 완화 ▲법관 처우 개선 및 10년 이상 경력 법관의 대형로펌 취업 금지 ▲대법관·헌법재판관은 국회의원 2/3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고 70세 정년까지 연임 ▲법관은 한 법원에 최소 4년 근무하고 이 기간 중 사무분담 변경 금지 ▲법관 근무평정 정밀 정비(1심 판사의 경우 사건처리율 70%, 항소율 및 파기율 각 15% 규정) ▲수사 및 재판의 영상녹취 제도 확립 등을 제안했다.

이호선 국민대 법대 교수(변호사)는 이날 “법문상 재판기한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명백한 강행규정을 지금처럼 멋대로 법원이 임의규정으로 해석해 재판을 지연할 경우 재임용 탈락 등 확실한 불이익을 주는 제재조치가 있어야 한다”며 “최근 독일 베를린주 헌법재판소는 2021년 9월 있었던 베를린주 지방의회 및 하원의원 선거에 대해 전면 무효 결정을 내리는데 14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고 연방헌법재판소는 재선거효력정지가처분을 각하하는데 겨우 두 달 남짓 걸렸다”고 전했다. 그는 “재판기한 준수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고수한 점도 눈에 띄지만 판결 선고를 포함한 심리 일정을 상당한 기간을 앞두고 미리 공표한다는 사전예고제도 주목된다”고 설명했다.  

19일 열린 '재판지연 사법방해 대책 세미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유상범 의원실)
19일 열린 '재판지연 사법방해 대책 세미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유상범 의원실)

2009년 로스쿨이 도입된 이후 변호사 수는 급격히 늘었지만 법관의 수는 그다지 증원되지 않았다. 국민의 재판청구권 실현 차원에서라도 합리적인 인사정책으로 법관 수를 늘려야 할 때다.

고위직 판사나 검사를 지낸 변호사를 고용해야만 재판 또는 수사에서 유리하다는 생각을 가진 국민들이 상당수에 달한다. 전관예우 효과에 대한 믿음이 여전하고 유전무죄(有錢無罪)에 대한 인식이 남아있다보니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전세계 167개국 중 155위에 불과하다. 판결을 믿지 않는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재판지연과 사법방해를 막을 수 있는 대책을 마련, 시행하면서 사법카르텔 척결 노력도 기울여야만 국민들이 보다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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