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05.24 12:15

[뉴스웍스=백종훈 기자] 금융당국이 올해부터 시행 중인 새 보험회계 제도 'IFRS17'을 놓고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제도 도입을 준비해 온 주체가 정작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만들지 않은 탓이다. 이제서야 세부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나섰지만, 이는 심하게 말하면 '직무유기'와 다를 바 없다. '무능행정'의 표본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로 인해 업계 안팎에서 보험사 실적에 대한 불신이 커져가는 상황이다. 보험사들이 가이드라인 없는 제도에 기반해 그야말로 역대급 실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정말로 실적이 좋아진 것인지 불분명해 보이는 보험사도 나왔다.
NH농협생명은 올 1분기에 작년 동기 430억원보다 무려 167%나 증가한 1146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달성했다. 작년 말 지급여력비율(RBC)이 147.5%까지 떨어지며 감독당국의 권고치인 150%를 밑돈 모습과는 정반대다.
더군다나 NH농협생명의 올 1분기 수입보험료(매출)는 전년동기 1조883억원 대비 1341억원 늘어나는 것에 그쳤다.
보험업계 전체로는 작년 전체 순이익의 76%에 달하는 순익을 3개월 만에 달성했다.
올해 1분기 기준으로 보험업계 전체 순이익은 5조2300억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으로는 생명보험사 2조7300억원, 손해보험사 2조5000억원 수준이다.
보험업계의 실적이 갑자기 좋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IFRS17 시행으로 보험계약마진(CSM)과 같은 수익지표 산출 과정에서 기업 자율성 폭이 이전보다 넓어졌기 때문이다.
업계 안팎의 불신도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자율성 폭이 커진 만큼 보험사마다 더 유리한 쪽으로 수치를 산출할 여지가 마련된 탓이다. 김용범 메리츠금융지주 부회장도 최근 열린 컨퍼런스콜을 통해 IFRS17 하에서의 자의적 계리 가정을 경계했다.
문제의 핵심은 수치를 유리하게 이끌어 내는 행위 자체를 아예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그 정도를 제어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 자체가 현재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IFRS17 도입의 주체인 금융당국은 보험사 실적에 대한 불신 해소를 위해 뛰기는커녕 변죽만 울리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보험사 CFO 간담회를 열고 "가까운 시일 내에 IFRS17 주요 계리적 가정에 대한 세부 기준, 즉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것"이라고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IFRS17이 금융당국 주도로 10년 전인 2013년부터 준비된 제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긴 시간을 투자하고도 가이드라인 조차 마련하지 못했다고 자백한 꼴 아닌가.
게다가 금감원은 IFRS17 시행에 앞서 내놓은 예측이 실상을 빗나가면서 이미 전문성과 권위에도 타격을 입은 바 있다. 금감원은 지난 19일 'IFRS17 도입 효과' 설명회를 통해 지난해 말 기준 보험업계 부채가 IFRS4 시행 때보다 221조원이나 감소했다고 밝히면서 새로운 회계제도 운영에 빈틈이 있음을 인정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아직 제도 시행 초창기여서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고 우려했다.
이어 "보험사는 '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금융당국이 관치가 아닌 지혜로 이 위기를 잘 풀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 상태로는 보험사 실적이 당장 좋아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IFRS17 제도 특성상 미래 예상이익을 현재 시점으로 끌어오는 것이 가능한 만큼 자칫 보험사 부채 부담으로 한꺼번에 몰려올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실적은 자본시장 내 기업의 성적표와도 같아서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금융당국은 이제라도 엉키고설킨 IFRS17 실타래를 현명하게 풀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돈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손해는 투자자와 이해관계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