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채윤정 기자
  • 입력 2024.04.02 13:51
ASML 엔지니어들이 장비를 테스트하고 있다. (출처=ASML 홈페이지)
ASML 엔지니어들이 장비를 테스트하고 있다. (출처=ASML 홈페이지)

[뉴스웍스=채윤정 기자] 미국·네덜란드·중국·대만 등 각국 정부가 자국 기업을 중심으로 수조원대 반도체 보조금 지급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투자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자, 자국 기업의 해외 이전을 막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반도체 지원 방안에 대해 세액공제가 아닌 보조금 지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4·10 총선(제22대 국회의원선거)을 앞둔 여야 간 입장이 엇갈리고 있어 주목된다.

여당은 "반도체에 직접적인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야당은 "반도체 보조금 대신 세액공제를 늘리겠다"고 맞서는 형국이다. 

TSMC 팹. (출처=TSMC 홈페이지)
TSMC 팹. (출처=TSMC 홈페이지)

◆거액 보조금 지급…생산시설 '해외 이전' 사전 차단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L의 해외 이전을 막기 위해 본사가 있는 에인트호번 지역의 주택, 교육, 교통, 전력망 등 인프라를 개선하는 내용의 ‘베토벤 작전’을 발표하고, 총 25억유로(약 3조6250억원)를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유일한 기업으로 반도체 업계에서는 ‘슈퍼 을’로 통한다. 

이는 네덜란드 '반이민 정책'을 이유로 본사 이전을 시사한 ASML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 네덜란드 정부는 기업의 세금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추가 조치도 예고했다. 네덜란드 내각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ASML이 네덜란드에 계속 본사를 유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앞서 ASML은 지난해 네덜란드 의회에서 고숙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없애는 법안이 통과되자 "고급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졌다"며 "차라리 본사를 다른 나라로 옮기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월 “더 많은 혁신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데, 그들을 여기로 데려올 수 없다면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ASML은 네덜란드 직원 2만3000명 가중 40%가 외국인일 정도로 고숙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미 세제 혜택을 줄여 자국 내 본사가 있던 석유기업 셸과 다국적 소비재 기업 유니레버 네덜란드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어 더 긴박하게 대처하고 있다. 

ASML 관계자는 "정부 계획을 우선 환영한다"며 “오늘 발표된 계획이 의회 지지를 받는다면 경영 조건을 강력히 지원할 것이며 사업 확장과 관련한 최종 결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가 취하려는 결정은 네덜란드에 계속 머무를지가 아닌 어디서 확장할지에 관한 것”이라며 해외 이전에 대한 여지를 남겼다. 

대만 정부는 TSMC에 보조금 대신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고 밝히고 지난달부터 공제 신청을 받고 있다. TSMC는 연간 300억대만달러(약 1조2600억원)의 세금 절감 효과를 누릴 것으로 분석된다. 

대만 정부는 TSMC 등 자국 핵심 기업의 ‘안방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연구개발(R&D) 비용 25% 공제, 최대 한도 없는 첨단공정 신규 장비 취득비 5% 공제 등 세제 혜택을 발표했다. 기준은 R&D 투자액 60억대만달러(약 2500억원) 이상, 고급 공정용 장비 투자액 100억대만달러(약 4200억원) 이상이다. TSMC와 세계 팹리스 기업 4위 미디어텍, D램 제조업체 난야테크놀로지 등 대만 대표 반도체 기업들은 모두 이를 충족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도 반도체 보조금 마련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은 1·2차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대기금)를 통해 2014년부터 총 3429억위안(약 63조7000억원)의 금액을 조성한 데 이어, 2000억위안(약 36조원) 규모의 3차 대기금을 모은다는 전략이다. 

미국은 2022년 시작된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2027년까지 총 527억달러(약 71조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정부는 자국 우선주의에 기초해 반도체 보조금 지급을 결정하고 있다. 최근 자국 기업인 인텔에 보조금 85억달러, 대출 100억달러 등 총 195억달러(약 26조원)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는 삼성전자에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는 60억달러(약 8조원)의 3배가 넘는 액수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각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반도체 생산라인 확대다. 몇 년 전부터 자국 내 반도체 생산라인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보조금을 지급해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보조금 지급으로 자국 기업이 자국 내 투자를 단행하면 반도체 생태계를 안정시킬 수 있고, 반도체 패권 및 주도권을 쥐는 데 유리해 강력 추진하고 있다"며 "특히 이들 정부는 자국 기업뿐 아니라 외국 기업에도 투자하면서 '반도체 강국'으로 가는 것을 꿈꾸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례로 일본 정부는 TSMC가 규슈 구마모토현에 세운 반도체 공장에 전체 투자금의 절반에 가까운 4760억엔(약 4조2300억원)을 지원했다. 또 새로 건립하는 구마모토 제2공장에는 7320억엔(약 6조4300억원)을 보조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또 TSMC 등 칩 제조업체에 법인세 최대 20% 공제를 해주는 세제 혜택을 추가로 발표했다. 미국 정부도 TSMC가 애리조나에 공장을 건설 중인 만큼 보조금 50억달러(약 6조7200억원) 이상을 지원할 계획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지난달 26일 울산 동구 동울산종합시장에서 손을 치켜들며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민의힘)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지난달 26일 울산 동구 동울산종합시장에서 손을 치켜들며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민의힘)

◆여 "보조금 지급" vs 야 "세액 공제 확대"

국내의 경우, 반도체 업계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0원'이다. 때문에 4·10 총선에서 여야 후보들은 반도체 생산시설이 있는 지역구를 중심으로 반도체 관련 공약을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신규 시설 투자에 대해 경쟁국 지원에 대응할 만한 직접적인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현재는 반도체 분야의 지원이 세액공제 등 간접적인 지원만 가능한 데, 직접 지원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특히 국민의힘은 경기 화성시을 후보로 한정민 전 삼성전자 DS부문 연구원을 내세워 주목된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의힘이 반도체 보조금 관련 법률을 국회 통과시키는 방안을 주도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며 "'그동안 반도체 업계들 사이에서 반도체 시설 인허가 절차 과정을 완화해달라는 요구가 계속돼 온 만큼, 국민의힘이 '반도체 시설 투자 인허가 절차 간소화' 공약을 내세운 것도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올해 말 일몰을 앞둔 조세특레제한법 기간을 연장해 세액 공제를 확대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일명 'K칩스법'으로 불리는 해당 법안은 반도체 설비 투자에 대한 기존 세액 공제를 대기업 기준 8%에서 15%로 늘리는 것이 골자다. 

이와 함께 민주당은 '반도체 인프라 설치 일정 비율 의무 지원' 공약을 내세웠다. 전기 및 용수 등 인프라 시설을 지으면 정부가 투자비 중 일정 비율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반도체 산업 중 무시할 수 없는 에너지 및 용수 문제를 고민한 것이 엿보이는 공약이라고 평가한다. 또 민주당은 총선 공약집을 통해 39번이나 반도체를 언급해 눈에 띈다. 

하지만 여야 모두 반도체를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어떤 규모로 투자할지, 또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이종환 교수는 "반도체는 여야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 되기 위해 정부는 꾸준하게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고 선결 과제를 내놓아야 한다"며 "반도체 보조금 등 정부 주도 아래 꾸준히 할 수 있는 정책을 내놓고 이를 이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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